태국 르이
학교에서 배운 등고선을 압축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산 깊은 골짜기 르이 호수Huai Nam Man 가는 길. 푸릇한 땅은 내려갈수록 마르다 질어지고, 겹겹이 흙 나이테를 드러내며 이내 물에 잠긴다. 키 큰 풀들 아래 이끼 낀 모습은 며칠 새 마른 그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지금은 건조한 겨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온 걸. 후에이남만 호수는 서서히 낮아지는 중이다.
사람들은 호수 위 뗏목집에 묵으러 이곳을 찾는다. 우리가 르이로 들리기로 마음먹은 이유도 마크가 이야기해 준 이 뗏목집 때문이다. 사공이 호수 한가운데로 집을 밀어주고 떠나면, 그렇게 호수 위에 누워 산이나 바라보며 느긋이 쉬는 거다. 바람 가는 대로, 물결 이는 대로. 식사는 때마다 나룻배로 갖다 주고 몇 시간 후 그릇을 되가져간다고 했다. 물론 호숫가 식당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호수는 영문도 모른 채 골마다 자신이 움켜 채웠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 맑고 밝은 하늘 아래 흙빛이 썰렁하다. 그 많던 호숫물은 누가 다 마셨을까.
태국을 하트 모양 풍선처럼 생겼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하트 골에 낀 지역이 바로 르이다. 르이는 태국 주 중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이다. 평야 지대와 붙은 먼 동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산간 지대니 그럴 만도 하다. 북쪽엔 메콩강이 흘러 라오스와 경계를 이루고 남으로는 펫차분의 국립공원과 붙어 있다. 우리는 어제 펫차분 서쪽 산들을 둘러봤으니 오늘은 동쪽의 남나오 국립공원을 가로질렀다가 북쪽 푸루앙Phu Luang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따라 올라갈 예정이다. 그 다음이 호수. 여기까지 온 게 아까우니 내친김에 메콩강까지 올라가 보기로 한다. 목적지는 메콩강변의 작은 마을 치앙칸Chiang Khan으로 잡는다. 강 너머 일몰이 그토록 아름답다 하니 5시 30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어제 도로는 내가 정한 터라 오늘 도로는 니콜라스에게 일임한다. 휴, 산간 도로 7시간 반. 어쩐지 밤새 끙끙대더라니, 내 머리론 상상도 못 할 꼬불꼬불 비효율의 극치 루트가 나온다. 다음날, 그의 루트가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늦잠꾼인 나조차 새벽부터 서두른다.
“니코, 아무리 생각해도 7시간은 심해…”
“오늘은 내 차례잖아. 태국 산길을 맘껏 누비는 거야!”
펫차분에서 롬싹 사거리로 직진한 뒤 12번 도로로 우회전하면(어제 사원 갔던 길과 반대) 남나오 국립공원 초입에 바로 닿을 수 있지만, 즉 40분 만에 가겠지만, 굳이 숙소 앞에서 우회전을 해 국립공원 곁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40분 받고 30분 더. 옆으로 과수원과 밭, 고무나무 농장이 펼쳐지다 산이 가까워지며 덩달아 언덕도 많아진다. 도로가 오르막 내리막을 옅게 반복한다. 물의 얕은 파동처럼, 작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어제의 우회전 좌회선 롤러코스터와 또 다른 재미다.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한다. 12번 도로는 고속도로라 국립공원을 지나는 데 입장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잘 닦여 있기까지 하다. 이 험한 산속에 4차선 도로를 내다니. 깎아지른 계곡 위로 아찔한 나무다리를 세운 것 하며. 산속엔 며칠 비가 왔던지 연둣빛 웃자란 대나무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서로 기우뚱한다.
국립공원을 가로지른 뒤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산 옆을 감싸며 올라간다. 정상이 테이블처럼 평평한 또 하나의 국립공원Phu Kradueng National Park을 구경한다. 나중에 듣기로 모습이 일본의 후지Fuji 산 같다고 르이 후지라고 부른다는데, 우리는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태국 알프스, 르이 후지, 태국 사람들은 자기 산에 유명한 산 이름 붙이는 걸 좋아하나 보다.
북쪽 특유의 목조 가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그만 사원과 마을들을 기분 좋게 지나친다. 도로엔 강아지들이 늘어져 자고 있다. 낮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요리조리 살살 움직인다. 꿈쩍도 않는 개들과 달리 닭들은 꼬꼬꼬꼬, 호들갑스럽게 뛰쳐나간다. 그동안 발리부터 푸껫, 카오락, 방콕... 도시화된 곳에서 지내다 보니 이런 시골 풍경이 그리웠다.
왜 이렇게 작은 마을까지 들어오나 했더니, 선택의 여지가 없던 거였다. 웬만하면 터널을 짓지 않는 태국. 산이 남북 직선거리(90km)를 가로막고 있어 외길이 커다랗고 둥그렇게 180km짜리 원을 그리고 있었다. 돌아갈 수밖에. 2시. 허기 진 니콜라스가 가게가 보이는 대로 선다. 고개 넘다 발견한 이곳은 가게라기보단 가정집에 가판을 둔 정도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국수를 먹는다. 나는 더워서 맥주나 한 병 마신다. 왜앵- 스쿠터가 도착하더니 한 아저씨가 안장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주인아저씨였다.
“타이 위스키, 타이 위스키. 프리!”
아저씨는 손으로 잔 넘기는 시늉을 하고선 컵을 가져와 위스키를 따른다. 병 라벨엔 하늘색 바탕에 빨간 쌀이 그려져 있다. 입을 대어 맛을 본다. 다음날 상당한 숙취가 예상되는 싸구려 보드카 맛. 어쨌든 태국산 도수 높은 증류주란 말인가 보다. 아저씨는 “굿?, 굿?” 묻더니 슬쩍 100밧이라 흘린다. 아마 외국인이라곤 일절 없는 산마을,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영업력을 과시하고 싶으신 것 같다. 어쩌면 우리랑 술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에 전화받고 달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한 잔 얻어먹고 고민에 빠진다. 세븐일레븐에서 보도 못한 술. 죄다 태국어라 이름도 못 읽겠다. 에잇, 그럼 어때. 하나 사 보지 뭐. 그저 이 마을 아저씨들 이 위스키 판 돈으로 즐겁게 노셨으면 좋겠다. 노름만 하지 마세요!
남은 길을 재촉한다. 날도 좋으니 재즈를 틀어 볼까. 루이스 조던Louis Jordan의 <Keep A Knockin’>. 조던의 경쾌한 리듬과 목소리, 그의 밴드 팀파니 파이브Tympany Five와 함께 한 알토 색소폰 솔로는 우리를 스윙이 만연하던 1920년대 미국, 곧 1차 세계 대전 무기 사업으로 떼돈을 벌던 화려했던 시절을 소개하고, 이어지는 텍스 베네케Tex Beneke 밴드의 <A Wonderful Guy>는 낭만적이고도 아릿한 향수를 일으킨다. 이 곡은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잘 알려진 로저스&해머스타인Richard Rodgers&Oscar Hammerstein 콤비의 작품으로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남태평양>의 넘버다. 우리가 두 대전 사이를 오가는 사이 하늘 위 구름은 점점 걷혀 간다.
I'm as corny as Kansas in August, I'm as normal as blueberry pie.
No more a smart little girl with no heart, I have found me a wonderful guy!
나는 8월의 캔자스처럼 촌스럽고, 블루베리 파이처럼 평범하죠.
나는 더 이상 멋모르는 작고 똑똑한 소녀가 아니에요. 멋진 남자를 찾았거든요!
(...)
I'm as corny as Kansas in August, High as a flag on the Fourth of July!
If you'll excuse an expression I use,
I'm in love, I'm in love, I'm in love, I'm in love,
I'm in love with a wonderful guy!
나는 8월의 캔자스처럼 촌스럽지만, 독립기념일의 깃발처럼 높이 떠 있어요.
혹시나 내 표현이 이상해도 눈감아 주세요.
나는 사랑에 빠졌거든요, 사랑에, 사랑에, 사랑에,
나는 멋진 남자와 사랑에 빠졌어요!
야생동물 보호 구역이 가까워 온다. 그들의 삶을 지키고픈 마음에 대신 조금 돌아가더라도 산을 둥그렇게 비껴간다. 국도도 고속도로도 아닌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동네 산길. 2차선, 때론 1차선인 도로 위로 푸릇한 논과 과수원들을 지난다. 워낙 통행량이 적은 곳이라 이따금 덜덜덜 가는 경운기와 아슬아슬 짐을 얹은 커다란 트럭들을 따라잡을 뿐이다.
골짜기를 둘러 후에이남만 호수를 마주한다. 멀리서도 강바닥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말라가는 호수. 구글 지도에서의 모습은 여전히 크지만 위성 지도로 바꾸는 순간, 이 호수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볼 수 있다. 눈으로 본 호수는 위성 지도보다도 더 작아져 있다. 우리는 알 것 같다. 누가 이 많은 호숫물을 다 마셔버렸는지. 고속도로를 타고 편안히 닿았으면 몰랐을지도 모른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가’ ‘어디 댐을 지었나’ 에먼 상상을 했겠지. 그러나 산길로 왔기 때문에 볼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산골짝을 뒤덮은 옥수수. 고개고개 산꼭대기 개의치 않고 한 알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 빽빽하게 채워버린, 인위적인 모습의 생명들이 산 밑으로 내려올 물들을 다 마셔버린 거다. 이러다간 언젠가 호수가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소련이 목화를 재배하려다 말려버린 아랄 해처럼.
나눠 낀 에어팟, 한쪽 귀에서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가 빌 케니Bill Kenny와 함께 부른 <Into Each Life Some Rain Must Fall>이 흘러나온다. “삶마다 때론 비가 떨어져야 하는 법이죠.” 참으로 놀라운 타이밍이다. 물론 삶마다 때론 고난이 닥쳐오는 법이고, 너무 많은 고난이 닥쳐와 힘들다는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삶, 이곳엔 비가 떨어져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망연히 호수를 바라보다 떠난다.
아유타야 근처에서 시작된 기나긴 21번 도로, 북으로만 올라오던 이 도로는 푸루앙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후에이남만 호수를 지난다. 그리고 그 머지않은 곳에서 끝난다. 그곳에서 치앙칸으로 올라가는 201번 도로를 만나 삼거리를 만들며 생을 다한다. 지금부터는 구불구불한 산길 없이 시원하게 달릴 수 있다. 시간은 벌써 5시가 넘어가고 있다. 조금은 급하게 속도를 내어본다.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짧은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