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회수 이후, 자주 울던 시기
내가 나의 내면 에너지를 온전히 통합하여
기억을 회수한 이후
(앞 글에서 밝혔듯이,
리듬형 존재로서 내 길이 이제 어떻게 펼쳐지는지 확실하게 알고
그 로드맵이 현실로 구현되는 것을 막 인지하기 시작한 시점을 말한다.)
이 시기 초기에 나는 공명으로 울던 일이 많았다.
내가 20년 가까이 명상 수련을 해왔고,
지난 10년 간은 빛의 언어 계열 마스터 중 한 분 밑에서
태극권을 방편으로 삼고,
명상 수련을 제대로 해온 이야기는
이곳 브런치에도
<20년 이상의 명상 수련 이야기>
<2580 아무튼 태극권 가족>
매거진에 짬짬이 글로 공유했다.
내면에너지 통합을 통해 기억 회수를 하고 나면,
자신이 이번 생에 가장 강점으로 활용할 방식 같은 것도 알게 된다.
나는 파동 번역과 리듬 공명이었다.
(이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다만, 내가 앞으로 에피소드로 공유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꺼이꺼이 공명하는 에너지들
기억 회수 직후,
이제 나의 설계도를 알고
진짜 이번 생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그 시작점에서
나는 자주 울었다.
나의 감정 기복 때문은 아니었다.
감당되지 않는 공명이,
중단전을 지나 꺼이꺼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분노로 위장하여 거칠지만, 사실은 진실을 지키고픈 연약하고 간절한 에너지.
억울한 죽음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에너지.
오랫동안 소리 내지 못하고 참고 희생하던 억눌린 에너지...
그리고 언제나 나를 무방비하게 속절없이 울리는 에너지가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 할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동네 어른들이 하나 둘 도와주는 장면.
기억 회수 전에도 난 이 장면에선 늘 오열했다.
그 드라마 속 어른들도,
자기네 인생 숙제 푸느라 갑갑한데...
그래도 조금 더 살아내어 숙제를 해왔기에,
아무것도 잡을 것 없이 막막하게 끈 떨어진 동네 소녀 하나는
결정적 순간에 거둬줄 수 있어서.
아니, 거둬준다기보단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것도 큰일 아니고,
그저 장례식에 꽃 하나 놔주고
문상 와주고
함께 걸어주는 일...
이런 정도의 힘에 나는 늘 속절없이 오열로 무너졌다.
낯선 모임에서 무대로 등 떠밀려 나가서 막막해할 때,
누군가 무대 밑에서 함께 해준다고 등 밀어주는 힘.
난 이런 에너지가 들어오면 그 즉시 중단전으로 꺼이꺼이 울게 된다.
진짜 작은 힘이지만,
가장 막막한 순간에 옆에 함께 있어준다는 에너지 말이다.
러브홀릭스 <버터플라이>를 부를 때마다...
아무튼 그 시절,
너무 많은 억눌린 에너지들을 중단전으로 직접 받으며
그들을 대신해서 꺼이꺼이 울다 보니,
어느 날부턴가
내 목소리가 너무 커지기 시작했다.
천계영 만화 <오디션> 주인공 황보래용이
목소리 조절을 못해서 구박받으면서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 정도로 크진 않았지만,
나도 목소리 조절이 안되어 당황하곤 했다.
그래서 노래방에 가서 일부러 소리를 좀 지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목소리라는 파동 통로를 개방하여
감당되지 않는 진동을 노래방에서 연습하며 조율하던 시간이었다.
그 당시 무의식 중에 어떤 노래가 떠오르거나,
나도 모르게 저절로 흘러나오거나,
아니면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노래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리듬형 존재들을 위한 응원의 노래들이었다.
그 당시 꼭 부른 노래가 있다.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
짝파동 존재에게 보내는 진동의 응원
원래는 내게 소중한 단 한 사람을 위한 노래였다.
그 사람과 나는 짝파동으로,
우린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서로를 보완하며 존재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내가 내면의 중심을 지키면서
가장 깊은 내면세계의 여정으로 침잠하고 있으면,
그는 이 파동을 받아
그대로 바깥 세계의 여정을 떠나는 구조다.
지금이야 기억회수 이후 우리 존재 방식의 구조와 의미를 알지만,
기억 회수 이전에 그 시간을 살아내던 당시엔
나도 막막했고,
그는 더 막막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면의 나침반마저 꺼져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내 능력을 말아놓고 펼칠 수 없는 삶이 답답했지만,
그래도 이 길을 끝까지 가면 된다는 확신의 나침반이 내면에 있었다.
그리고 기억 회수 이후,
나의 나침반이 지금껏
그에게 아리아드네의 실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아직 기억 회수 전이어서 여전히 존재로서 방황하는 괴로움 속에 있었다.
난 그가 능력을 말아 넣기 이전 빛나는 모습을 봤었기에,
그의 능력을 덜 쓰고 있는 현실은 안타까워도
여전히 그의 내면의 빛을 보고 있었는데,
그는 그 자신의 빛마저 보지 못하고 어둠에 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그를 위해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부를 때마다 중단전에서 꺼이꺼이 울음이 터지고,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목소리가 커져 있었다.
어느 정도 그의 감정을 대신해서 해소해 주기도 했고,
그 역시 그즈음 기억 회수를 하게 되어
이제 더 이상 이 노래는 나와 그를 위한 위로의 노래가 아니어도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응원의 노래이긴 하다.
코쿤을 지나, 나비가 될 시간
그런데 이 노래는
노래방에서 부를 때마다 울었다.
매번 처음처럼 울었다.
눈물이 흐르는 그 순간엔
‘이게 뭐지?’
하지만, 곧바로 난 그 파동을 번역해 낼 수 있었다.
어딘가에서
이 노래가 자신들의 막막하게 말려있는 시간에
응원의 힘이 되어준다는 것에 대한 공명이었다.
나는 이제 기억회수를 통해
말아 넣었던 누에고치의 시간, 코쿤의 시간을 넘어
나비의 시간을 시작했다.
이제 이 노래, 그리고 이 글에 공명하는 그 누군가가
나비가 될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그걸 먼저 기억해 낸 존재로서
나의 리듬을 끝까지 존중해서 살아내면,
나만의 고유한 길이 펼쳐진다는 것을
계속 글로, 나의 활동들로 나누겠다.
(사실 이 글의 단상 메모를 버스 안에서 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어딘가 말린 존재들이 지금 막막함에 대해
살짝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는 에너지가
중단전 공명으로 들어왔다.
버스 안이라 최대한 꺼이꺼이 소리 내지 않게 흑흑거렸고,
그나마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난 눈이 부신 걸 힘들어해서
차 안에서도 가급적 선글라스를 끼고 있고,
밀폐된 공간에선 사람들의 에너지가 바로 들어와서
가급적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