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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Eyre Dec 08. 2019

가지 같은 시간

페랑디 9주 차(2019.12.02 - 2019.12.06)




파리의 12월이 시작되니 매일 아침 이불 밖으로 나오기 힘들 정도로 지독하게 춥고, 땅은 항상 바로 비로 젖어있다. 하굣길에 어두워진 거리는 아낌없는 상점들의 불빛들로 가득 메워지고 거리 곳곳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하다. 목도리 안으로 수염 난 턱을 깊숙이 파 묻은 한 중년의 남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들고 바쁘게 어디론가 향한다. 어디선가 잔잔하게 들려오는 캐럴을 들으니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새삼 깨닫게 된다. 파리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크리스마스가 어쩌면 마지막 크리스마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쉬움이 순간 밀려왔다. 어쩌면 그것은 제과제빵 직업을 선택하고 11년 중 가장 여유로운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지도 모른다. 나도 장갑 낀 손을 상의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고 그곳을 가로질러 불 꺼진 내 보금자리로 향했다.



이제 어딜 가도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다



한국에서 제과점에 취업하고  크리스마스를 맞이 했을 때였다. 엄청난 생산량과 근무시간에 많이 놀란 나에게 선배가 말했다. "우리는 남들이 바쁠  한가하고, 남들이 한가할  우리가 바쁜 직업이야" 한국에서는 새벽 못지 않게 국경일 같은 흔히 말하는 빨간 날과 친해져야 하는 직업임은 부인할  없다. 제과와 크리스마스를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것은 제과점에서    가장 바쁜 날이기 때문이다. 제과점의 규모나 작년 판매량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가을이 시작되면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아직 프랑스에서 일해  적이 없어 이곳의 크리스마스의 제과점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모른다. 성수기와 비수기가 확실한 직업. 우리가 만든 제품들이 그들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식탁 위에 초대되는 행운을 가진 직업. 결국은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파업


프랑스에 파업은 흔한 일이다. 예고했던 대로 파리는 12월 5일에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그냥 파업이 아니고 대규모인 이유는 관공서부터, 파리의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마비되고 그 기한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교가 교통편 문제로 수업을 미루거나 휴강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페랑디도 파업의 폭풍을 제대로 맞았다. 공용으로 쓰는 탈의실에서 대화를 들어보니 파업 때문에 페랑디 제빵과정, 요리 과정은 모두 C.B(CAP BLANC)을 당겨서 본 모양이다. 혁명의 국가답게 모두가 들고 일어 선 무기한 파업이지만 친구들은 생각보다 태연하다. 나는 프랑스에서 짧은 파업을 몇 번 마주했지만 나에게 큰 영향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고 필요한 행위라고 친구들이 말했다. 대부분의 교통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파리 외곽에서 등하교를 하는 친구들은 파업 당일 절반 정도가 학교에 오지 못했다.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사는 줄 덕분에 나는 편하게 오토바이로 등하교를 하고 있다. 심지어 10분이면 도착한다. 자전거 어플을 알아보던 나에게 먼저 제안한 그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려고 했더니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내가 이 곳에서 받은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 다 돌려주고 가지 못할 것 같아 최소한의 예의라도 하고 싶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사서 다음 주에 깜짝 선물해주려고 한다. 날씨가 아무리 춥고 언어적인 장벽이 있어 답답할 때가 있어도 그들 덕분에 올 겨울은 따뜻하기만 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파업 첫날 새벽 줄을 기다리면서 / 나에게 완전히 헬멧까지 맡겼다



줄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초콜릿 ! 선물 사러 갔다가 먹은 시식 초콜릿




그를 통해 기억하는  과거

줄이 저번 주부터 매주 토요일에 파리의 한 호텔에서 실습을 시작했다. 첫 실습이 어땠는지 궁금해서 줄에게 토요일에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고 느껴졌다고 이야기했다. 장식을 담당했는데 너무 느렸고 시키는 것을 잘 완수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매일 주방에서 빠르게 일하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항상 웃음 많은 그의 자책감에 마음이 좋지 않으면서도 처음 내가 제과점에서 일할 때가 생각났다. 도서관 다녀오는 버스 안에서 그를 위해 장문의 편지를 썼다.


너 덕분에 11년 전에 내가 제과점에서 처음으로 일했을 때가 생각났어. 학교와 제과점의 환경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지. 선배들은 나에게 제과 일을 그만둘 것을 권유했어. 왜냐하면 나는 욕심은 넘쳤지만 업무 속도가 느린 사람이었어. 심지어 궁금한 것도 많았어. 나는 그때 진심으로 이 직업이 나와 맞는지 생각했고 혼자 많이 울었어. 그땐 난 어렸고 자신감이 없었어. 네가 너 자신을 믿는다면 나는 네가 갈수록 더 작업 속도가 빨라지고 너의 기술들은 개선될 거라고 믿어. 네가 일을 하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는지가 중요해. 당연히 프랑스는 세계에서 제과로 유명한 나라잖아. 나는 프랑스인인 네가 부러울 때도 있어.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져. 처음은 뭐든 어렵고 힘들어.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줄. 주말 잘 보내.



제품 하나도 남들과는 다르게 장식하는 줄, 힘내라 친구야



발표 수업


마날은 15년 동안 에어프랑스 승무원으로 일했다.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까지 총 5개 국어를 하고 일본어도 조금 할 줄 안다. 이번 우리 그룹 발표의 팀원이다. 파업 전부터 매일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고 적지 않은 나이에 회사에 장기휴가를 내고 제과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페랑디에 들어왔다. C.B와 우리 그룹의 발표가 있는 한 주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빠지지 않고 헬스장에 운동하러 가는 것은 그녀의 정신력과 자기 관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철저한지 알 수 있다. 술도 일체 마시지 않아서 시럽에도 절대 알코올(보통 제품의 향을 첨가하기 위해 넣는다)을 넣지 않는다. 나에게 집에 세탁기가 있냐고 물어보면서 내 조리복을 매주 금요일 방과 후에 자신에게 주면 자신의 조리복과 같이 빨아서 월요일에 가져오겠다고 제안하는 보기 드문 친절함을 가졌다. 다시 승무원으로 복직하면 서울에 꼭 오겠다고 했다. 마날과 서울에서 만날 때는 조금 더 불어가 늘어 그녀와 더 원만한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발표하는날 2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혼자 중얼중얼 연습 중


거의 3주 동안 주말에 도서관에서 파워포인트를 포함한 발표 준비에 시간을 보냈다. 생전 처음 들어보고 읽기도 어려운 단어를 이해하면서 문장을 만들고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작업은 외국인인 나로서는 그들보다 두세 배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사실 다른 그룹보다 더 완벽하고 특별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심지어 라자의 부재로 3명이서 준비하는 우리들은 우려와 달리 더 끈끈해졌다. 서로 늦은 시간에도 문자로 발표 준비 이야기를 하고 그들은 몇 번이고 친절하게 내가 만든 파워포인트를 수정해줬다. 마날과 하타나는 내가 걱정할 때마다 웃으며 다독여줬다. 한주에 하필 C.B와 발표가 같이 있으니 신경 쓸 것들이 많았다. 하타나는 그런 나에게 자신이 정리하고 모아 놓은 이론 자료들을 전부 보내줬다. 그리고 내가 발표 때 발음 문제로 걱정하자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더니 내가 만든 발표자료를 조용한 곳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해줬다. 어떤 복이 있어서 그들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지 모르겠지만 살면서 그들의 따뜻함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발표가 끝났다. 하타나가 마지막으로 발표하는 순서였다. "성민이가 파워 포인트를 다 만들고 걱정이 많았는데 끝까지 잘해줘서 너무 고맙다" 고 했다. 예상에 없던 대사라서 숨고 싶었다. 셰프도 3명이서 이렇게까지 준비하느라 너무 고생했다며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줬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우린 최선을 다했다. 하타나와 마날은 집에서 각각 다른 식물성 크림들로 5가지의 디저트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하타나와 마날에게 문자가 왔다.


"너와 같은 팀이어서 영광이었어. 우린 어느 팀보다 잘했고, 너는 최고였어. 우리 이번 기회로  알아가게 되는 좋은 시간이 된거 같지 않아? 고마워. 남은 CAP까지 열심히 하자"


한참 동안 멍하니 문자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그 자리에서 발이 뗄 수 없었다.


학교에 집 열쇠 두고 와서 두번이나 학교 간날, 바보 성민이



CAP BLANC
실기 시험은 시험에서 원하는 규칙에 맞게 작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엄청난 기술력과 작업의 노련함을 보는 시험이 아니다. 한국에서 제과제빵 기능사 자격증이 없는 경력자들이  자격증 시험을 떨어지는 이유는 시험에서 원하는 규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품을 만드는 것에는 많은 방법이 존재한다. 이미 굳어져 버린 경력  업무 습관이 기본 규칙을 제대로 지킬  있을지는 과거의 자신에게  답이 있다.


이번주에 유일하게 찍은 내 제품 사진, 살구 타르트


C.B 이틀 전에 수험 번호가 나왔다. 제품도 장식 주제도 아무것도 모른다. 시험이라는 자체가 주는 압박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친구들의 연령대도 대부분도 학교를 떠난 지 평균 15년이 넘는 친구들이다. 24명의 응시자, 4개의 주방, 18명의 감독관. 진짜 처음으로 온전하게 4가지 품목의 제품을 6시간 30분 동안 만들어 내야 한다. 시험 전날 서로의 손을 잡으며 내일 파이팅 하자는 그들의 의지 넘치는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오전 8시, 강의실에서 어떻게 제품을 만들어 낼지 계획표를 30분간 적어서 내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여김 없이 비가 내린다. 산딸기 무스케이크(장식 주제는 크리스마스), 바나나 캐러멜 초코 타르트, 뺑 오 쇼콜라 8개, 뺑 오 초코 피스타치오 8개, 피스타치오 에끌레어 12개, 나머지 반죽은 전량 슈게트(흔히 우리가 아는 슈의 작은 모양에 우박 설탕이라고 잘 녹지 않은 설탕이 묻어 있는 제품)가 이번 C.B 품목이다. 기술과 위생에 대해 말하기 시험도 중간에 포함되어서 원할 때 감독관에서 말하고 보면 된다. 친구들이 나보고 천천히 하라며 웃으며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생각보다 여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기 시험까지 치르고 나니 오전 시간이 생각보다 여유롭지 않았다. 사실 현장에서 만드는 양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양이지만 제빵 경력이 있는 나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 분배였다. 18명이나 되는 감독관이 무언가를 체크하며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출근해서 작업이 1분 느려지면 퇴근은 1시간 늦어진다"라는 제과점에서 직원들과 하던 농담이 생각났다. 아침 시간은 시험에서도 제과점에서도 중요하다. 결국 모든 제품을 진열하니 종료 시간보다 30분이 일찍 끝났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제품은 생각처럼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앞치마와 조리모를 벗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휴게실에서 대기하는 친구들, 그리고 내 자리



점심시간에 학교 식당에서 음식을 계산하려고 했다. 30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내 페랑디 카드에 잔액이 부족해서 충전하려고 하니 직원이 오늘은 기계 고장으로 충전이 안된다고 했다. 식판을 그대로 두고 나가려고 하자 다른 그룹의 친구가 직원에게 "이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우리 오늘 시험이라서 식사 챙겨 먹어야 하고 30분밖에 없어요. 빨리 이걸로 계산해요" 고장 난 게 자랑이냐며 큰소리쳤다. 그러더니 웃으면서 나에게 "그거면 충분해 성민? " 물어본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고 나와 그녀에게 시험 끝나고 식사비 주겠다고 했더니 괜찮다며 그것을 지불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고 내 앞에서 사라졌다. 영화에서 보던 영웅이 있다면 그녀가 아닐까 생각했다.


시험 끝나고 한시간에 걸쳐 꼼꼼하게 점수를 매기는 18명의 셰프들



실기는 늘 친구들에게 걱정 없다고 이야기했다. 때로는 어떻게 하면 일을 빨리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나는 비교적 점수 비율이 적은 이론에 더 신경이 쓰였다. 24명 중에 가장 작업 속도가 빨랐지만 제품 하나하나에 더 신경 쓰지 못했다. 장식 주제에 맞춰 작업했던 파스티아쥬(설탕 파우더와 젤라틴을 섞어 만드는 찰흙 같은 하얀 반죽)는 오히려 감독관에게 좋지 못한 평을 들었다. 시험이 끝나고 감독관 몇 명이 제과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지 물어보더니 내 제품에 만족하냐고 물어봤다. 제품은 완전히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이 시험에서 다양한 것을 시도하기보다 기본에 충실할 것은 나에게 제안했다. 빗소리가 굵어지고 학교 입구의 경비실을 제외한 페랑디의 모든 불이 꺼졌다. 아직 남아 있는 이론 시험이 있지만 피곤함보다는 후련함이 앞서는 지금의 학생의 존재에 감사한다.



당신들과 함께 하는 겨울이라면 더 길어도 좋을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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