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단단한 나의 것들
유독 향과 글을 연결 지어 전개하는 과정에 흥미를 느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냄새에 예민한 편이었다. 악취, 향기 가릴 것 없이 옅게 풍기는 냄새조차 금세 감지할 정도로 후각이 발달한 편이라 특정 순간을 냄새로 기억해 추억하는 버릇이 생겼다. 후각의 발달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주변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엄마, 이거 무슨 냄새야? 위에 환풍기 좀 켜지.”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며) “다 네가 먹을 거야.”
“자기야 창문 좀 열자 냄새가 너무 심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영하 10도야.”
남들은 다 괜찮다는데 나만 유별나게 코를 틀어막는다거나, 심하게 재채기를 해대거나, 괴로워하는 경우가 잦아 이젠 내 주변인들도 그러려니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그냥 ‘재 또 저러네’ 정도일까? 예민하고 미성숙했던 어린 시절에야 냄새난다고 요란하게 티를 냈지 요즘엔 슬며시 코를 막거나 입으로 호흡하는 식으로 자제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후각이 발달해 좋은 점이 더 많다. 뇌피질에 자리 잡은 기억 능력이 후각 수용체와 아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 특정 냄새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때로 돌아가 다시금 행복 (혹은 불행을) 맛볼 수 있다. 여행 수필을 즐겨 쓰는 사람에겐 최고의 능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에서 맡은 라벤더 향, 카타르의 독한 향수 냄새, 핀란드의 시나몬 향... 전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그리운 냄새를 맡으면 순식간에 장면이 전환되면서 나는 과거로 순간이동 한다. 아무래도 직접 경험을 텍스트에 온전히 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이 모든 향이 글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이런저런 방법을 고심한다. 종이에 라벤더 오일을 뿌리거나 시나몬 롤을 종이에 대고 ‘냄새야 배어라, 들어가라.’ 주문을 외지만 이렇게 한다고 냄새가 들어갈까 싶지만, 현대기술로 아직 불가능한 일이라 최대한 단어를 고심해 서술하려 노력한다. 내 코끝에 맴도는 여행의 향이 읽는 이에게도 전파되기를 바라며.
혈기왕성한 내 20대는 여행으로 가득하다. 여행지의 온갖 냄새를 맡고 기억하고 반추하며 살다가 서른이 넘어 어릴 땐 이해하지 못했던 안정적인 삶을 (나도 모르는 새에) 추구하게 되었고 문득 내게는 어떤 냄새가 날까 궁금해졌다. (냄새라고 하니 며칠은 안 씻은 것 같지만) 아무리 향수를 뿌리고 깨끗하게 씻어도 사람마다 채취가 다르다고 하니 타인은 내게서 나는 특정한 냄새를 맡고 어떤 인상을 받을지 궁금해졌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며 ‘나’ 중심적인 삶의 방향이 비로소 외부로 방향을 전환했고 세상에는 직접적인 맛과 피상적인 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맛과 향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테면 사랑은 어떤 냄새가 날까?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존재한다.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 연인의 로맨틱한 사랑, 동료 간 동지애, 사제 지간의 존경. 타인에게 뻗어나가는 사랑.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필리핀의 어느 시골마을로 봉사활동을 떠난 적이 있다. 수도 마닐라에서 내려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교육의 도시 두마게티까지 이동한 다음 미니밴을 타고 5~6시간을 더 이동하는 장거리 일정이었다. 시간과 장소가 뒤죽박죽이라 정확한 지역명을 기억할 수 없어 안타깝다. 우리는 수풀이 우거진 열대우림 같은 곳을 지나갔고 외교부의 '내전지역' 경고 문자가 연신 날아왔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커 높은 나무와 울창한 풀숲마저 이국적으로 보였다. 미니밴이 도착한 곳은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내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 오히려 지루할 것만 같은 평화롭고 목가적인 동네였다. 우리는 매일 아침 지프니를 대절해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이상 이동해 시골 마을 곳곳에 있는 데이케어 센터를 방문해 교육 봉사를 했다. 말이 교육 봉사지 레크리에이션 강사나 다름없었다.
하루는 계획이 틀어져 기존에 가기로 했던 센터가 아닌 조금 더 규모가 큰 새로운 곳을 가게 되었다. 다인원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수업을 고민하다가 혹시 몰라 챙겨간 수채화 물감이 떠올랐고 아이들과 데칼코마니 그림을 그리는 촉감 수업을 하게 되었다. 흙을 발라 쌓아 올린 15평 남짓 교실 한 칸에 에어컨도 없이 서른 개가 넘는 작은 나무 의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강남스타일'의 나라에서 온 대학생들이 보고 싶어 참관한 한 무리의 어머니들이 교실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시골 마을에서도 우리를 보면 지나가던 청년들이 말춤을 춰댔다.) 몇몇 엄마들은 물감을 처음 본다고도 했다. 교육 봉사는 모두를 위한 미술 놀이가 되었다.
'도화지를 절반으로 접었다 핀 다음 한쪽 면에만 튜브 형태의 물감을 짜고, 손으로 문질러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든 뒤 다시 선을 따라 반으로 접은 다음 꾹꾹 누른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건지 궁금해 목을 쭉 빼고 구경하는 엄마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절반으로 접었던 도화지를 펴는 순간 아이들의 왕방울만 한 두눈이 저러다 눈알이 또로록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커졌다.
어느 정도 더위가 가시고 해가 뒷모습을 보일 때쯤 먼저 마친 아이들이 자기 상체만 한 도화지를 꼭 쥐고 나와 풀밭 위에 하나둘 펼쳐 놓았다. 신선하고 씁쓸한 건초 냄새, 싸구려 도화지의 눅눅한 종이 냄새와 미세하게 풍기는 물감의 화학 냄새, 사람들의 시큼한 땀 냄새가 기억난다.
사랑이었다. 내 안 가득 피어오른 충만한 감정은 사랑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저 아이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튜브를 짜내려고 꼬물거리는 짧은 손가락, 철 지난 be the reds 티셔츠, 검댕이 묻은 볼, 경계 없이 들러붙는 순수한 눈망울. 그 안에서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아이들을 향해 피어나는 충만한 사랑을 느꼈다.
매년 타는듯한 더위가 찾아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야외 행사를 준비할 때면 어디선가 물감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그들의 어머니와 비슷한 또래였던 우리는 다들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그때 내가 느꼈던 사랑의 냄새가 내게 풍기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