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단단한 나의 것들
나는 늘 나의 일부가 하늘을 떠돈다고 생각했다. 몸은 우리 집,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내 일부가, 조각이 구름 위를 날다가 파리에, 헬싱키에, 도쿄에 혹은 코트디부아르 아니면 산호가 아름다운 무인도 어느 바닷속에 착륙해 세계를 탐험하는 중이라고 말이다.
10년 전 모 카드 회사 광고 문구로도 유명한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처럼 노동의 이유는 일탈에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와 쉼을 맛보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인간의 본능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OTT나 유튜브에서 여행 관련 콘텐츠가 주를 이루는 요즘, 한국인의 삶에서 여행은 의식주만큼이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여행 별로 안 좋아해.’라고 대답하면 이상한 취급받기 십상이라 섣불리 입을 떼기가 꺼려질 정도인데 끼리끼리 논다고 내 주변엔 다 나처럼 어디 떠나기 좋아하는 애들뿐이라 ‘여행 별로...’라고 말한다면 너도나도 여행을 좋아하게 만들겠다며 달려들 것이다.
나는 여행을 왜 좋아할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낯선 장소에서 만나는 색다른 '나'의 모습에 큰 흥미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혀를 마비시키는 자극적인 기내식을 받아먹으면서, 공중을 표표히 날아가는 무국적자가 된 착각에 빠져있으면 눈 깜짝할 새에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낯선 ‘나’로 새로 태어난다. 10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도 하나의 과정일 뿐.
여행지에서 나는 느긋하고 친절해진다. 누가 내 발을 밟아도 인상하나 찡그리지 않고 버스를 놓쳐도 허허 웃고 만다. (출근길 해프닝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음식도, 쇼핑도, 산책도, 카페 투어도 평소와 다르게 흘러가는 낯선 일상에 낯선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거침없어진다.
올 한 해 우리나라를 여행지로 선택하는 유럽인들이 급증하면서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내용이 바로 음식관광이다. 영화, 드라마, 유튜브 콘텐츠 등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한국의 디저트와 스낵류를 포함해서 한 상 거하게 차려먹는 한정식, 건강한 한식, 제철 음식 등 잘 먹고 다니는 음식 여행이 도장 깨기 수준으로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라고 다를 게 없다. 평소엔 끼니를 거르던 사람도 외국 여행에서는 기를 쓰고 현지인 맛집과 카페를 찾아다니고 하루 다섯 끼를 감행할 정도로 먹는 거에 목숨을 건다. 그만큼 여행지의 음식은 중요하다.
당신은 고수를 좋아하나요?
해외 여행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 필수 표현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유용한 단어를 하나만 꼽으라면 ‘Coriander?(고수 들어가?)'이다. '겨우, 그게?'하며 피식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다. 고수를 못 먹는 사람이라면 고수가 살짝 닿기만 해도 질색하며 세제 냄새니 비누 냄새니 난리치다가 한입도 못 먹고 식당을 나와야 할 수도 있으니 낯선 여행지에서 돈과 기분을 다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반드시 물어봐야 하는 필수 질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첫 쌀국수를 함께 경험한 친구는 성인이 되어서도 고수를 절대 먹지 않았다.
‘아직도 적응이 안돼?’
맡아도 맡아도 세제 냄새가 강하게 올라와 도저히 먹을 수 없단다. 데코처럼 살짝 얹어 놓은 고수도 질색하며 치워버리는 친구라 덕분에 쌀국수 2인분을 위한 고수는 모조리 내 차지가 되었고 연락이 끊겨버린 지금까지도 쌀국수에 고수를 숭덩 올릴 때마다 그 친구가 떠오르곤 한다. 반대로 고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왕창 넣어 달라고 할 수 있으니 더욱 필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나를 필두로 우리가족은 고수를 아주 좋아한다. 처음 맛본 쌀국수에 들어간 고수도 능히 넘겼다.
‘참나물 같은데?’
'더 넣자.'
몇 해 전 오키나와로 떠난 가족 여행이 떠오른다. 타코라이스라는 말도 안 되는 ‘일본’ 요리가 서빙되어 나왔을 때 밥과 과자, 고수의 삼합을 목격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꿈꿔본 일이 이웃나라 접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과자를 반찬으로 먹는 상황을 실제로 맞닥뜨리자니 함부로 숟가락을 들기 어려웠다. 용감한 엄마가 먼저 한입.
‘맛있는데?’
흰쌀밥에 잘게 부슨 타코, 칠리소스와 마요네즈까지 이상한 조합 속에서 풀입에 앉은 화려한 나방처럼 더욱 눈에 띄는 고수가 의외로 생뚱맞은 이 조합을 하나로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고, 고수 듬뿍 타코라이스는 조화로운 맛을 보여줬다. 오키나와 어느 가게에 가나 타코라이스가 있었고 3박 4일의 짧은 일정 동안 우리 가족은 매끼 타코라이스를 한 접시 씩 시켜 나눠 먹으며 이 가게와 저 가게의 레시피를 비교하고 고수의 역할을 평가하곤 했다. 지레짐작 ‘고수를 싫어하겠지’ 판단한 가게 주인이 고수를 내놓지 않아 ‘고수 없나요?’를 입에 달고 다닐 정도였다.
낯선 나라에서 맡는 낯선 향과 맛이 좋아 우리는 질리지도 않고 타코라이스를 시켜댔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초 위에 칠리소스와 고수를 뿌려 먹으며 여행의 향수를 달랬다.
작년 봄, 주택으로 이사한 김에 큰 마음 먹고 만든 작은 텃밭에 제일 먼저 심은 것도 고수 모종이었다. 이제껏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기 어려운 종이라 지레짐작했던 과거가 한탄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자라나는 고수 덕분에 저녁마다 샐러드에 고수를 얹어 먹곤 했다. 밥상 위에 고수가 올라와 있는 생경한 장면을 볼 때마다 오키나와의 푸른 바다가, 낯설었던 타코라이스가, 여행지의 우리가 자꾸만 떠오른다. 겨우 두 주 심었을 뿐인데도 먹는 속도가 성장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남겨진 고수 잎은 누렇게 변해버렸고 키만 멀대같이 커졌다. 그리고 흰 꽃을 피웠냈다.
강렬한 맛과 어울리지 않는 하얗고 소박한 꽃잎이 오히려 고수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기만하던 풀이 조금은 친근해지려는데 의외의 출신지가 가로막는다. 뿌리부터 베트남 출신일 것 같던 고수는 의외로 지중해 동부 연안 출신이다. 조금 가까워진 마음이 다시 낯설어진다. 이래서 고수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