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라는 단어는, 수많은 아름다운 유물이 그러하듯 이십일 세기에는 쓸모가 없다. 온갖 기계들이 빛을 뿜어대는 세상인데 하늘의 왜소한 반점까지 빛이라고 쳐주긴 어려운 노릇이다. 내가 이런 말을 늘어놓는 건 새삼 신세 한탄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사회를 향해 훈계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날 밤 제희와 내가 걷던 숲길이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는 걸 미리 말해두고 싶을 뿐이다. 달은 제 몸을 그나마도 반으로 자른 채 떠 있었고 우리는 랜턴 불빛에만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본 적 있다는 동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숲속에 살고 있다는 낙타를 찾아서.
터무니없는 소리.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인간들이 있다. 어쨌든 하루 세끼는 벌겠다는 생각으로 생활의 규칙을 세웠다가도, 금세 제 손으로 그걸 부숴놓곤 하는 것이다. 방 한구석에서 무릎에는 담요를 덮고 사전을 뒤적이는 일상. 나는 아침 여덟 시에 잠에서 깨어 일을 시작했고 오후 한 시에 배를 채웠다. 작업의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아서 식사를 간소하게 넘기다 보니 호밀빵 한 덩이에 홍차를 곁들인 점심이 매일 반복되었다. 생활의 선택지가 너무 협소하다 싶을 땐 우리가 사는 동네와 분위기가 판이한 곳으로 향했다. 화려한 간판들이 분신하는 번화가로. 근사한 조명이 달린 테라스에서 맥주를 한 잔 시켜두고 난간 너머를 보면, 저마다 옷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었을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성공했다는 인간들의 평균을 내보면 어떤 괴물이 만들어질까? 제희와 술을 마실 때면 이런 걸 농담이라고 늘어놓고 낄낄 웃어댔다. 사회의 기준에 가장 걸맞은 사람들을 줄 세워 그들의 옷차림, 체형, 얼굴의 평균치를 계산하면 어떤 형상이 될지.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 정반대의 인간상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우리와 닮았을 게 분명하다. 거짓말, 과장, 허풍. 제희와 나만큼 이런 것들에 어울리는 인간은 찾기 힘들 테니까. 그래서 밤중에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험도 일종의 연극이라면,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 삶에 관객이 있어서 그들이 간간이 손뼉을 쳐주고 실수하면 위로도 해주고 내가 울 때 함께 울어준다면 누구도 외롭다고 자살하는 일은 없을 텐데. 우리의 생활이 아무도 봐주지 않는 연극 같아서 문득 쓸쓸했고 또 우스웠다. 소용없는 달이 소품처럼 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상식 하나. 모든 인간은 본모습을 숨긴다. 하지만 번화한 동네로 집을 옮긴 후, E를 만나러 재즈바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이 도시가 이제 연극 무대로써도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연극에선 매 순간이 현재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목을 치기 위해 암살단이 암약하는 조선 뒷골목이든, 상상력에 권력을 부여하겠다고 퍽 순진한 구호가 울려 퍼지던 68년 파리의 혁명이든, 무대 위에 구현되면 그것은 관객에게 시공간을 뚫고 당장 현실이 된다. 적당한 어둠이 그런 기적을 가능케 한다. 백열전구를 수십 개 매달았다면? 무대가 여백 없이 밝혀질 테고 뻔한 현실이 들통나겠지. 술꾼들이 어둑한 구석 자리를 좋아하는 건 그런 까닭이다. 나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서는 당연한 순서처럼 맨 구석 자리에서 E를 찾아냈다.
처음엔 능숙하게 농담을 던질 생각이었다. 재즈바에서 와인이라니, 완전 부르주아 식이잖아요. 적을 알고 나를 알자, 뭐 그런 건가? 이런 농담을 친근한 사이인 양 던져보는 것이다. 나는 E와의 대화에 앞서 늘 계획을 세워놓아야 했다.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상대였으니까. 그는 사회에 분노하는 지식인 같았으나 어떨 때는 싼값에 재고를 팔아치우는 장사꾼이었고, 업무를 설명할 때면 유쾌한 행사를 준비하는 양 미소를 지었다. 말을 마치면서는 늘 굳은 표정으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처음 만난 날엔 내 신상을 하도 상세하게 캐물어서 실은 사복 경찰이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에 돈이 급했던 나는 의심은 접어두고 그의 말에 따라 냉큼 월간지 『잡지』의 필진이 되었다. 다달이 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고시원 생활을 청산, 월세방으로 이사 올 즈음이 되어서야 나에게 이만한 돈을 쥐여주는 이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돌이켜보면 『잡지』의 업무 체계는 이상할 만큼 비효율적이었다. E가 나에게 영문 원고를 전달한다. 내가 그걸 우리말로 번역하고 메일로 보낸다. 편집부의 일차 검토를 거치면, E는 인터넷 전화로 나에게 연락하여 수정 방향을 지시한다. 매달 한 번씩 E가 내가 사는 동네로 찾아와 술을 사주며 다음번 원고 방향을 설명하고, 빳빳한 현찰로 원고료를 준다.
하지만 그 돈의 출처는 알 수 없다. 편집부 구성원 전체가 익명이니까. 내가 접촉할 수 있는 건 E 한 명뿐으로, 말하자면 그는 편집부의 익명성을 보장해주기 위해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어떤 단체에서 『잡지』를 발행하는지, 원고 방향은 누가 정하는지, 내 월급의 출처는 어디인지, 아무리 캐물어 봐야 E는 뻔한 말로 둘러대거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밀이 모두를 지켜준다는 게 E의 입버릇이었다. 무슨 위험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되물으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원고는 대개 좌파적 관점의 사회변혁론, 혁명사, 노동 정책의 기만성 등을 대중적으로 풀이한 글이었고 그중에 내가 맡은 부분은 세계 노동 운동 현황을 설명하는 영미권의 칼럼이었다. 『잡지』가 완성되면 전국 대학가와 노동조합, 시민단체, 노점상이 널린 번화가 골목 등지에 수천 권이 무상으로 살포된다. 만든 이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기재되지 않았다.
E는 우리가 만날 장소를 매달 다른 곳으로 바꾸었고 매번 인상착의가 달라졌다. 안경을 쓰거나 벗었고, 머리를 물들이고 파마를 했다가도 신입사원처럼 정장을 입고 머리를 빗은 채 나타나기도 했다. 고작 겉모습뿐인데도 그렇게 행색을 카드 뒤집듯 바꾸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자니 수차례 만나서 술을 마셔도 가까워지는 느낌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나를 당황케 했다. 재즈바 계단을 내려와 E를 찾자, 그의 맞은편에 초면의 여자가 앉아 무언가 열심히 떠들고 있는 게 보였다. 친근한 척 농담 던져보자는 계획은 아무래도 실천하기 어려울 성싶었다.
E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쪽으로 걸어가자 E는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그 여자의 옆자리로. 낯선 사람이 술자리에 끼어들면 으레 그렇듯이 그들의 대화가 중단되었다. E는 나와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