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죠? 이쪽은 제희 씨라고 해요. 사진 담당.”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봤다. 그쪽은 맥주를 들이켜던 자세 그대로 이미 나를 곁눈질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만남을 예상하지 못한 건 여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는 짐짓 씩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뒤늦게 얼굴을 활짝 펴며 악수에 응했다. 안녕하세요, 그다음에 우리끼리 무슨 대화를 이어붙일 시간도 없이 E가 말을 시작했다. 오늘은 본론부터 이야기하게 될 것 같네요. 제희 씨랑은 벌써 사진에 대해서 논의하던 중이라. 나는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라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새까만 조끼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위스키 한 잔을 내 앞에 날라다 주었다. E가 미리 주문해둔 것이었다. 나는 그걸 한쪽으로 밀쳐두곤 탁자에 턱을 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두 사람의 대화가 재개되었다. 그들은 답이 안 나올 게 뻔한 논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사진은 과연 재현을 벗어날 수 있는가? 추상이냐 구상이냐, 실재냐 관념이냐 따위에 대해서. 머리 좋은 치들이 모여 설전을 벌이다 보면 본래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가능한 점잔빼는 어휘로 상대의 기를 죽여버리는 게 지상과제가 되어버린다. 나는 현실과는 조금 거리를 둔 그들의 삶을 경멸하면서도 동경했으나, 결국은 그들의 세계에 섞여들 수 없었다.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술만 홀짝이는 버릇이 든 것이다. 오가는 말 중에 의미 있는 사실은 제희가 도시 뒷골목 유기 동물들의 연작 사진을 찍어 전국 대회에서 입상한 대학생이란 것뿐. 문제는 E는 예술성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번 호의 주제가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는 환경이므로, 추상적이고 복잡한 예술 사진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담아보는 편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실제 현장을 취재해서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찍어달란 거예요. E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제희는 날것이요? 라고 되물으면서 농담이라도 들은 양 깔깔 웃어댔다. E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왜 웃어요?”
“재밌어서요. 날것을 찍으라니.”
“아, 제희 씨는 스무고개 타입이시군.”
“스무고개?”
“할 말을 한 번에 안 하고 계속 질문을 유도하는 타입. 뭐가 재밌다는 거죠?”
“…….”
E는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옆으로 밀쳐두고 우리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복부가 탁자에 닿을 만큼. 제희는 몸을 조금 뒤로 젖혔으나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옛날, 사람들이 돌도끼를 들고 수렵 생활을 하던 시대에 대해서. 그때 어떤 부족은 동굴에 벽화를 그려놓았는데 그게 수천 년이 지나 발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동굴이 산사태라든지 그런 거 때문에 외부 공기로부터 차단돼서 그림이 운 좋게 보존된 거죠. 외부 환경에 예민해서 사람의 숨결이나 아주 작은 빛만으로도 훼손되기 때문에, 연구 허가받은 사람들만 장비를 입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제희는 사진기를 들고 피사체 앞에 설 때마다 그 이야기가 떠오른다고 했다. 사진은 결국 빛을 기록한 거니까. 지금 찍은 사진이 실제 세상을 담은 걸까? 실제 세상이란 건 뭔가?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그게 현실이 아닌 건 분명하죠.
제희는 거기까지 얘기하고는 앞에 놓인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제희의 행색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녀는 꼭 언니 옷을 훔쳐 입고 나온 꼬마처럼 보였다. 걸친 옷과 장신구가 전부 체형에 비해 지나치게 컸다. 동그란 뿔테 안경이 얼굴 절반을 가렸고 쥐색 코트는 손목을 전부 덮을 만큼 소매가 길었다. E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별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입술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아내고 나서 말을 더 이었다. 플라톤, 데카르트, 인식론. 제희의 이야기는 시간이 갈수록 지나치게 현학적이 되어 오히려 좀 초조하게 들렸다. 몇 년 전까지 저런 책들을 탐독하던 나 자신이 떠올랐고, 그래서 E가 미소를 지으며 역시 해박하시네요, 라고 말했을 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제희가 말을 그치자 E는 나를 턱짓했다.
“은규 씨도 예술가 아닌가? 연극 했었잖아.”
“글쎄…….”
“이건 은규 씨 의견도 중요한데, 어떻게 생각해요?”
“그런 질문은 좀 낯선데.”
E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오늘은 다들 스무고개야?”
“여태까지 선택지가 있었던 거 같진 않아서. 난 지금 여기…… 이름이 제희 씨 맞죠? 제희 씨랑 왜 같이 있는지도 설명을 못 들었단 말이죠.”
그 말엔 E보다 제희가 먼저 반응했다. 고개를 들고 E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E는 입가에서 미소를 싹 지우고, 들고 있던 와인잔을 탁자에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업무 설명을 시작할 때의 습관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잡지』의 구성원들은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분류, 관리된다. 가능한 구성원끼리의 접촉을 금하는 게 원칙이지만 한 명씩 일일이 만나기엔 관리 인력이 부족한 탓에 구역별로 한 번에 만나 일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원래 제희가 이쪽 구역의 유일한 필진이었는데 내가 이사 오면서 함께 관리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제부터는 둘의 업무에 관련성이 생길 거라고 E는 말했다. 관련성이라면? 환경 운동에 관한 칼럼을 줄 거예요. 은규 씨는 원고를 번역하고 제희 씨가 우리 사회의 현장을 찍으면, 글과 사진이 함께 올라가도록 편집할 계획이에요. 그 말을 하면서 E는 둘의 협업이 중요하긴 해도 가능하면 서로 가까워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했다. 몇 달 전에 노조 파괴 현장을 취재하던 필진 하나가 용역 깡패에게 붙잡혔어요. 그가 신상을 알고 있던 필진까지 줄줄이 쫓겨 다녀야 했죠. 다시 말하지만, 비밀이 모두를 지켜줍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E는 늘 나에게 무언가를 경고했다. 『잡지』의 수익구조에 대해 궁금해하지 마라. 편집부에 대해서 알려고 들지 마라. 제희와 가까워지지 마라. 하지만 결국 내가 하는 일이라곤 원고를 한 줄씩 번역하는 것뿐이었고, E는 간혹 꼬마들에게 겁을 주겠답시고 어설픈 괴물 이야기나 지어내는 보모처럼 보였다. 몇 가지의 경고사항과 일거리, 원고료를 건네주고 E는 내가 알 수 없는 세계로 돌아갔다. 마지막 모습은 매번 같았다. 아무리 늦어도 열한 시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낯선 사이가 된 듯이 고개를 깍듯이 숙인다. 계산대로 걸어간다. 술값을 치르고 다른 인사말 없이 밖으로 나간다.
그날도 E는 제희와 나를 남겨둔 채 먼저 떠났다. 빈 와인잔만이 그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리며 놓여 있었다. 제희는 조금 남은 맥주를 단번에 털어 마셨다. 내가 한 잔 더 하겠느냐고 물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젓더니 대뜸 말했다. 저 사람 말, 얼마나 믿어요? 제희는 맥주잔을 밀어내고 탁자에 팔꿈치를 올렸다. 담배를 물고 불을 댕겼다. 난 의심부터 하고 보는 편이에요. 그래도 재밌으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예전에 연극을 했었다는 사실을 E에게 한 번도 알린 적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제희의 말을 신뢰하게 된 것 같다. 어쩌면 그녀의 말을 듣고 숲속까지 따라가게 된 건 그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 사연을 나누었다. 자정이 다 되어 함께 거리로 나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