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희는 마치 누가 총부리라도 들이댄 듯이 그 자세대로 멈춰서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희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그 소리가 나만의 착각은 아닐 터였다. 제희는 불빛 때문에 무언가 놓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순간 랜턴을 꺼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랜턴을 그녀가 쥐고 있으니까. 어쩐지 내 주위에 모이는 인간들이라곤 죄다 독선적인 작자뿐인 것 같았다. 나는 수십 개의 자석 틈에 놓인 쇠붙이처럼 사방으로 끌려다니는 것이다. 고시원에서 살다가 E를 만난 것도, 제희를 알게 된 것도, 숲에 들어온 일도, 결국 수락한 건 나였음에도 그 모든 일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 있었다는 생각. 그녀의 뒤를 부러 느릿하게 뒤따르는 동안 나는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니까, 한밤의 숲길에서, 제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될 때까지.
어떤 이들은 한 번도 어둠 속에 놓여 본 적이 없다.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은 더 많은 빛을 뿜어내어 어둠을 무슨 더러운 것인 양 지상에서 추방해내는 데에 골몰했고, 그 결과 어둠은 실패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나는 고시원에서도 값이 저렴한 창문 없는 방을 골랐다. 빛이 들어올 틈이 전혀 없는 그 방에선 아침과 저녁이 구분되지 않았다. 새하얀 커튼을 투과하는 아침 햇살, 그런 서정적 이미지는 내 생활엔 없는 것이었다. 컴컴한 방에서 눈을 뜨면 꿈속의 장면이 차라리 아릿하게 밝은 것으로 기억되었다. 내 소망은 점점 더 현실적인 문제로 옮아갔다. 누구든 나에게 확실한 생활 방편만 마련해준다면 그를 위해 뭐든 해줄 텐데. 극작은 끝났다. 이제 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배우에게 대사를 주는 역할에서 떨어져나와, 타인이 나에게 배역을 부여해주길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잡지』에서 일을 받게 된 이래, E가 전화를 걸어오면 나는 그게 업무에 관한 지시임을 알면서도 내심 싫지가 않았다.
제희 씨랑 계속 접선은 합니까? 가끔요. 일에 대해 얘기도 좀 하구요? 음, 글쎄요. 아직 특별한 말은 못 들었습니다만. E는 지난번에 재즈바에서 업무를 지시한 뒤로 이 주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가 숲으로 들어가기 며칠 전이었다. 그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제희에게서 작업물에 관한 말을 들은 게 없는지 재차 물었다. 내가 제희에게서 사진을 받아보긴커녕 어떤 작업을 했는지 들은 바도 없다고 말하자 E는 한숨을 쉬며 무어라 구시렁댔다. 인터넷을 통한 전화여서 그 말을 또렷이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제희가 연락이 되지 않는 데 대한 불평일 게 뻔했다. 작업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물어도 답이 없고, 사진 중 일부를 보내기로 했던 기한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말이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업무를 부과한 자신이 이 문제의 책임을 질 판이라고 E는 딱딱하게 내뱉었다.
나는 E에게 물었다. 저번에 그 얘기가 해결 안 된 거 아닌가요? 사진이 뭐 재현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추상적인 사진 말고 직접 취재해봐라 그 얘기…… E는 내 말에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그건 원래부터 제희의 마음대로 하게 둘 계획이었다고. 그녀가 고집 센 예술대 학생이란 건 편집부에서도 알고 있었고 어차피 그녀에게 기대한 게 취재 사진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좀 세련된 사진을 걸어두어 젊은 층이 『잡지』에 관심을 두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이데올로기도 세련돼야 먹히는 시대잖아요?”
“그럼 저번엔 뭐하러 그 문제로 논쟁한 겁니까?”
“제 입장에선 통제해야 하니까요. 제희 씨 같은 타입의 문제는, 보다시피 지시를 잘 안 따르는 거라서……. 공놀이랑 마찬가지인 겁니다. 둥글다 보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물건을 이리저리 잘 굴리는 게 관건이죠.”
E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화를 통해서도 뚜렷이 감지되었다. 그는 여태껏 봐온 중에 가장 신랄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 타입의 문제. 그렇다면 그는 나 같은 타입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E는 지금 이 문제엔 내 책임도 있다고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고시원을 전전하던 시절에 『잡지』를 발견했다. 창작은 지지부진한 생활을 묘사하되 그것을 실제보다 좀 더 우월한 세계로 재창조하는 일—한때 탐독하던 극작 이론서엔 그렇게 적혀 있었으나 그건 외국에 형편 좋은 학자의 주장이고, 나는 아무리 뻗대봐야 생활과 예술을 동시에 챙길 수 없었다. 한때는 찬란한 섬광을 내비치는 듯하던 책들은 내가 여태껏 공상에 빠져 살았다는 걸 증명하듯이 고시원 방 한쪽에 처치 곤란의 종이 뭉치로 남았다. 겉보기에만 멀쩡하면 매입가 좋게 쳐주는 헌책방에 그것들을 전부 팔아넘기면서, 나는 신분 세탁하는 범죄자가 된 양 비장한 기분마저 느꼈다. 방에는 이제 예전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내 몸뚱이를 제외하고는. 조금은 넓어진 방에 누워 잠을 청하며 어쩐지 공기가 서늘해진 것도 그 기분 탓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방 안을 감도는 묘한 한기는 날이 지날수록 무시 못 할 것이 되어갔다. 며칠이 지나자 등뼈 사이사이에 서리 낀 양 허리가 시리고 뻐근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고통스러울 지경이 되자, 나는 이 문제엔 물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결론 내리곤 강박적으로 방바닥을 더듬었다. 그러자 밑에서 싸늘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장판을 들추자 나는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쥘 수밖에 없었다.
장판 밑의 시멘트 바닥이 하수구 악취를 풍기며 드러났다. 건물 벽을 통과하는 배수관 같은 게 터진 모양으로, 물길 따라 시커멓게 썩은 자국을 보자마자 이대로 오래 방치됐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즉시 장판을 도로 덮고 일 층의 고시원 관리인에게 가서 따졌다. 건물 상태가 저러면 고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늙은 관리인은 읽던 책을 덮지도 않고, 얇은 철테 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오히려 조용히 하라고 검지를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3층에 구석방 맞지요? 안 그래도 배수관 공사 예정이니까 좀만 기다려요. 그러나 공사는 내 방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진행되다가 그쳤다. 내가 다시 따지고 들자 관리인은 엉뚱한 시설을 만지며 노력하는 척하다 관두었다. 미안해요. 그가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해버려서 나는 진이 빠졌고 싸워볼 마음도 사라졌다. 이걸로 따지는 놈이 처음은 아닐 테지. 이번 달만 어떻게든 지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하자고 체념하곤 방에 돌아와 불을 켰다.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라도 두껍게 깔아볼까 생각이 들어 장판을 다시 들추었다. 그러자 거기에선 내가 처음에 보지 못했던 글귀들이 발견되었다.
이 방을 거쳐 간 이들의 기록. 장판을 들춰본 사람이, 그리고 밑바닥이 썩어 있는 걸 어찌하지 못한 게 나뿐만이 아니란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벽이나 책상에 낙서하는 건 금지되어 있던 터라 다들 감방에 온 듯이 장판 밑에 몇 줄씩 써둔 모양이었다. 장판을 더 들춰보니 아예 바닥 전체가 커다란 롤링페이퍼인 양 사람들의 글씨로 가득했다. 나는 꼴사납게 울컥해서 한 줄씩 읽어내렸다. 실패를 인정하는 게 무서워서 통과 못 할 시험을 반복하는 이들. 헤어진 연인을 저주하는 저속한 문구. 빚을 감당하지 못해 날마다 거처를 옮기는 도망자. 익명의 청자를 향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놓은 그들에게 나는 묘한 애정을 느꼈다. 그달 말에 방을 비우고 다른 고시원에 거처를 잡았다. 그날 나는 남은 돈을 털어 혼자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배회했다. 폐수에 젖어 대개 활자도 알아볼 수 없게 된 책더미를 그때 보았다. 새삼 놀랄 것은 없는 광경이었다. 내가 팔아넘긴 책들도 몇 명의 손을 거치고 나면 결국 저것과 비슷한 쓰레기통에서 명을 다할 예정이었다. 나는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잡지』를 집어 들었다. 혁명, 민중, 정의. 뒷골목에서 썩어가는 주제에, 세상이 금방 뒤집어질 게 뻔하다는 듯이 허황한 승리를 주장하는 단어들. 그 시절에 나에게는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내 고시원 동지들 역시 세상이 언젠가 한 번은 뒤집어질 거라는 희망을 벗 삼아 창문 없는 방에 몸을 뉘었을 것이다.
버려진 것들이 어둠에만 묻혀 있는 사회는 뒤집어져야 마땅하니까, 우스꽝스러울 만큼 질 게 뻔한 싸움이라 해도 기꺼이 지는 편에 설 것이라고, 나는 전에 없이 감정적인 각오를 하면서 『잡지』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하지만 다이얼을 눌렀을 때 들리는 건 이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기계음뿐이었다.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뺨 맞고 꿈에서 깬 양 전화를 끊었는데,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발신자 표시 제한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것이 E와의 첫 번째 통화였다. 그날 이후 나는 E의 업무 지시에만 따라왔다. 제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