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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Sep 18. 2023

단편소설_ 조명은 달빛 #5 (마지막 화)

눈이 숲의 어둠에 적응하길 기다렸다. 키 큰 나무들이 나를 둘러싸고 위협하듯 서 있었다. 우리가 향하던 방향으로, 아니 적어도 우리가 가던 길이라 생각되는 쪽으로 스무 걸음을 더 걸어가고 나서야 나는 제희가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도시의 발광하는 밤거리에 익숙해 있던 터라 조금 떨어져 걷는다고 해서 사람을 이렇게 놓칠 수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눈에 힘을 주고 달빛에 의존해 멀리까지 시선을 뻗쳐도 시커먼 나뭇가지뿐, 집구석과 동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추방당한 듯했다. 여기까지 들어온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대책 없는 짓이었는지. 나 자신이 숨바꼭질 중에 너무 멀리 도망쳐서 해 질 녘에 미아가 된 어린애 같았다. 낙타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두 손을 흔들며 떠들던 제희가 떠올랐다. 여긴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이다. 그런 게 있을 리가. 다시는 이런 황당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걸음을 떼었다.


멀리 떨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혹여 발걸음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으나, 숲은 소음으로 가득했다. 나뭇잎 수만 장이 수다스럽게 몸을 뒤척였고 찬바람은 목줄 끊고 달아난 짐승처럼 나뭇가지를 흔들고 돌아다녔다. 저쪽의 소리를 듣고 찾아가는 건 힘들 듯하니 내가 소리를 치기로 했다. 제희 씨, 제희 씨. 그렇게 부르며 숲길을 한참 걸었을 때 마침내 응답하듯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음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두 발로 걷는 사람의 소리라기엔 좀 부산했다.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홱 돌렸다. 어둠 속이었으니 형체를 알아볼 수 있으려면 그게 무엇이든 내 코앞까지 와야 할 터였다. 둔탁한 발굽이 흙을 딛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 소리가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때, 나는 눈을 감았다. 밝은 빛이 번개처럼 터져 나왔기 때문에.     


잠시뿐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에 낙타를 봤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달빛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나는 사라진 단어를 선호한다. 수명이 다한 것들엔 진중한 울림이 있는 까닭이다. 지문이 없는 것, 과장된 것, 여기 나의 생활과 무관한 것. 연극을 통해 나는 삶을 실제보다 아름답게 가장하는 성채를 지으려고 했고, 사람들은 보통 자족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연극을 그만두던 날, 무대 위에 의자를 하나 두고 앉았다. 텅 빈 객석을 기념사진처럼 눈에 담았다. 다들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생활이 소란스러울 것이다. 이 시대에 현실보다 자극적이지 못한 이야기들은 몇몇 어휘와 함께 침몰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현실에서 달아나려고 애썼던 만큼 가능한 실리만을 따지는 인간이 되어보려고 작정했다.


『잡지』에 몸을 담은 건 실리에 따른 판단이었을까. 나는 그 일을 통해 여전히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이뤄보겠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눈이 뻑뻑할 때까지 원고를 들여다보다가 창밖에 시선을 던질 때면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기도 했다. 시대와 맞지 않은 탓에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해, 세상 자체와 부딪치기로 한 투사에 나 자신을 투영해보는 것이었다. 창밖으론 동네를 반원으로 둘러싼 숲이 내다보였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숲의 정경은 공상을 펼치기 좋은 도화지 역할을 해주었다. 『잡지』가 배포된다. 도시 곳곳으로. 퇴근하는 시민들, 술에 취한 학생, 주휴수당을 당연히 받지 못한 편의점 알바, 뜨거운 기름이 튀어 손등에 화상을 입고도 일이 서툴다고 오히려 타박을 받는 식당 종업원, 밤마다 유흥업소에서 낡은 관악기를 부는 중년의 악사. 굶주리면 어떤 일이든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한패였다. 가끔은 내가 옮기는 체제니 자본이니 하는 글들이 정말 거대한 주먹이 되어 현실을 후려칠지도 모른다고, 모두를 함께 분노케 하여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마치 내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초월자인 양 꿈꾸었다. 그럴 적마다 나는 평생 연극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창문을 닫고 다시 책상 앞으로.


“뭘 찍은 거예요?”


나는 환하게 웃고 있는 제희에게 고작 그렇게 물었다. 플래시. 황급히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그녀가 말도 없이 랜턴을 꺼버리는 바람에 서로 놓쳐버렸다가 찾은 상황, 내가 몇 마디 쏘아붙여도 괜찮을 입장이었는데도 카메라를 손에 들고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보자 당장 무슨 상황인지가 우선 궁금해졌다. 제희는 둘 다, 라고 대답했다. 둘 다? 내가 되묻자 제희는 나를 턱짓하고는 손가락으로는 내 등 뒤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숲은 여전히 어두웠다.


못 봤어요? 제희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내 팔을 움켜쥐고는 조금 전에 손짓한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동안 잠시 서로를 놓쳐서 헤맸던 일에 대해선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희는 두서없는 말을 재잘거렸다. 진짜 있었다고. 사진도 몇 장 찍었으니 이따가 보여주겠다고. 동물원에서 도망쳤을까? 혹에 이끼 같은 게 끼어 있어요. 여기 오래 살았나봐. 플래시를 터뜨리면 무서워서 도망가더라구요. 그래도 또 찾을 수 있을 거야. 좀 빨리 따라와 봐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근거로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제희는 씩 웃었다. 여기가 이제 유일한 집일 테니까요.


무언가 발견했는지 제희의 걸음이 느려졌다. 나도 멈춰섰다. 제희는 전방의 어둠을 또렷이 응시하며 카메라를 잡았다. 저기 보라는 듯 턱을 까딱하는데,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녀가 당연히 나보다 날카로운 눈을 지녔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진짜일지도 모른다. 정말 저기에 뭐가 있을지도. 셔터 소리. 번쩍하는 빛. 플래시가 비추는 찰나에 어둠 속에서 두 개의 혹을 본 듯했다. 하지만 도망가는 발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희는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셔터를 다시 누르려고 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피사체에 한 걸음 다가갔다. 좀 더 정확히 보기 위해서. 이번에도 아주 잠깐뿐일 테니까. 제희가 셔터를 누르길 기다리며, 나는 내가 여태껏 이렇게까지 빛을 갈구해본 적 없다는 이상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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