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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Dec 04. 2023

영하 18도에서도 달렸다

달리면 덥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핸드폰에 뜬 바깥 온도에 달리러 나가기가 망설여진다.  


"밖에 영하 18도인데 뛰어도 될까?"

"이런 날엔 군대에서도 안 뛰어" 


자던 남편이 대꾸하고 돌아 눕는다. 두꺼운 타이즈에 패딩 반바지를 입고 발목토시 끌어올려 종아리를 감쌌다. 모자를 눌러쓰고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운동화를 잡으면 내가 이긴 거다. 나는 오늘 달릴 것이다. 챌린지앱에서 한 달간 달리기 인증을 했었다. 야외에서 운동화 신고 있는 사진을 올리는 걸로 그날 달리기를 인증했다. 만원을 내놓고 목표를 달성하면 원금에 실패한 사람들이 낸 돈을 성공이자로 돌려받았다. 받으면 몇 백 원이 안 되는 돈이었지만 뿌듯함은 그 이상 되었다. 그렇게 뛰러 나가는 연습을 해 놓은 것이 영하 18도의 날씨에도 일단 나가게 만들어준다. 


삐거덕. 1층의 공동 현관문을 여니 벌써 볼이 차다. 코끝에 쨍하다. 머릿속까지 번쩍 떠지는 기분이다. 바닥이 얼었는지 살피는데 염화칼슘이 이미 뿌려져 있다. 춥다는 예보에 어제 미리 뿌려둔 것 같다. 차량 차단기를 지나고 우이천이 시작되는 곳까지 걸어 내려갔다. 파란색과 초록색 시내버스들이 산속 주차장에서 내려오고 있다. 구름빵에는 이미 불이 훤하다. 뛰러 나갈 때마다 불이 켜있다. 새벽 3시부터 나와 빵을 만드신다는 사장님 모습이 분주해 보인다. 구름빵 불빛 때문에 비장한 새벽 러닝이 따뜻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모닝빵을 사서 들어가야겠다. 솔밭공원에는 새벽잠이 없는 어른들이 새벽 3시부터 나와 공원 산책을 나오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새벽 5시는 달리기는 이 동네에선 그냥 평범한 일이다. 


버스 종점을 지나 신호등을 건넜다. 우이 경전철 역을 지나 성원아파트 뒤 길로 들어섰다. 길을 건너면서 우이동 계곡이 우이천이 된다. 우이천 시작점에는 다리 아래 수문이 닫혀 있다. 하천은 꽁꽁 얼었다.  한 여름 무성했던 풀들은 폭우 때 일부 떠내려갔다. 살아남은 풀들은 가을에 억새빛이 되었다. 지금은 앙상하게 가지들만 엉클어진 채 남아있다. 물을 온통 뒤덮는 풀을 보며 저게 어떻게 되나 심난했는데 가을, 겨울 지나며 마르고 뒤죽박죽이 된 상태에서 새 잎이 올라왔다. 어느새 새 잎들이 자라 마른풀들을 다 덮어버렸다. 정원관리를 배운 눈으로 하천을 보며 저기도 저 넘치는 풀을 뽑고 정리해야 하는 건지 심난스럽게 보다가 환호로 바뀌었다. 사람손이 안 닿아도 자연이 유지되고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아파트 단지 길이만큼 데크가 깔려 있다. 직진으로 뻗어 있어 뛰기 좋다. 데크가 끝나는 곳부터는 하천으로 내려가는 길을 만날 때까지 신축 빌라들 앞으로 난 좁은 인도를 뛰어야 한다. 새벽엔 한가한 길이지만 낮에 뛸 때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본격적인 러닝트랙은 집에서 1km 지나 덕성여대 하천길에서부터가 좋다. 자전거를 끌고 내려갈 수 있는 비탈길로 내려가면 자전거 길과 걷는 길로 구분된 길이 한강까지 이어진다. 하천의 건너편 도로도 정비되어 있어 돌아올 때는 해 방향 따라 반대편길로 돌아올 때도 있다. 나는 런데이 앱으로 달리기 시간을 잰다. 오늘은 15분 뛰어가서 15분 돌아올 것이다. 시작 신호에 맞춰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이미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길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오히려 춥다는 예보가 있으니 빙판길 정비가 구석구석 잘 되어 있다. 


달리기 앱의 초급 트레이닝은 1분 뛰고 1분 쉬 고고 시작한다. 그러다 2분 달리고 쉬고, 3분 달리고 쉬고 하면서 가랑비 옷 젖듯 늘어난 달리기가 8주가 되면 30분 연속 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린저씨(런데이와 아저씨의 합성어)의 달리기 상식을 들으며 뛰면 금방 시간이 간다. 길에서 개를 만났을 대의 대처법을 들은 후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뛰고 싶었던 날도 있다. 30분을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날도 벅찼었는데 나는 오늘부턴 영하 18도에 달린 사람이다! 15분이 지났다며 잘했다는 소리에 방향을 튼다. 


추워서 멈추지 않으니 반환지점까지 순식간에 왔다. 돌아가는 길은 북한산 백운대를 마주하며 달리는 길이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낮은 집들, 큰 아파트 뒤로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산이 우뚝 서 있다. 날이 밝아오며 산도 환해진다. 중년에 불면증 때문에 시작한 달리기는 몸도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친구도 만들어 주었다. 어린이집 엄마들과 함께 뛰면서 우이동러닝크루도 가입했다. 우이천을 달리다 만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러닝크루가 아닐까 싶어 한번 더 보게 된다. 러닝클럽 크루원들이 운동을 시작하면 핸드폰으로 알람이 온다. '응원'버튼을 눌러 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응원을 보낼 수 있다. 내가 달리다 보면 이어폰에서 누가 응원을 보내왔다며 함성과 박수소리가 들린다. 닉네임 망치가 응원을 보냈다. 딴생각을 하다가 정신이 든다. 박수와 함성소리에 괜히 두 팔을 벌려 하늘로 뻗어본다. 응원받은 김에 힘을 좀 더 내본다. 


맨 얼굴엔 찬바람이 계속 닿고 가장 얇게 입은 무릎 위는 차갑지만 잠바와 모자 안으로는 땀이 나기 시작한다. 멈추면 땀이 식을 테니 계속 움직여야 한다. 우이천 시작지점까지 돌아와 횡단보도를 건너 집까지 가는 오르막도 쉬지 않고 뛰었다. 구름빵에 들려 흰색 높은 제빵 모자를 쓴 사장님께 모닝빵을 샀다. 집에 들어서니 온몸에 묻혀온 냉기가 집안의 온기에 녹아내린다. 어느새 달리기가 나의 겨울나는 방법이 되었다. 달리기를 하고부턴 추워지면 자꾸 가라앉는 감정이 두렵지 않다. 이번 겨울은 또 어떻게 나나 싶을 땐 '달리기를 하면 되지'라는 답이 내 안에서 들린다. 겨우내 헝클어진 마른풀들이 봄이 오면 초록으로 뒤덮어지듯 겨울의 상태는 엉킨 채 그냥 나면 된다. 뛰다 보면 어느새 봄이 오고 금세 초록으로 뒤덮인다. 쨍하게 코끝이 추운 날 달리는 맛을 실컷 맛보고 충분히 쪄진 호빵처럼 김을 모락모락 내며 후다닥 따뜻한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도 겨울 달리기만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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