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일이 된 사람의 일상
'그것이 무엇이든 전공을 하면 싫어진다.'는 격언이 있다. 그리고 사회에 나오면 '전공'이라는 단어를 '직업'으로 바꿔도 된다는 걸 깨닫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나다.
나는 남들이 '노는 곳'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학창시절에 공부만 해서 그런 듯) 공연, 전시, 영화, 드라마, 페스티벌, 스포츠와 같은 콘텐츠부터 공연장, 영화관, 놀이동산, 호텔, 경기장까지 사람들이 신나게 노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관심은 취미가 되고 취미는 꿈이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노는 곳에서 일을 시작한 나는 연차가 쌓여갈 수록 뭘하고 놀아도 일처럼 느껴지는 신비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단계까지 오면 내가 일하고있는 분야 외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잡덕의 숙명같은 것인데 예를 들어 공연 일을 하고 있으면 전시가 해보고 싶고, 전시 일을 하고 나면 스포츠를 해보고 싶은 알고리즘이 생성되는 것이다!
취미가 취미가 아닌 나날들을 보내다가 백수가 되었으니 관심사는 다시 자연스럽게 만물에게로 뻗쳐 나갔다. 그 동안 피곤하다는 핑계로 가지 못했던 공연이나 전시를 보고 놀러 다니고 책을 신나게 읽었으며 새로 생긴 리조트 동향을 살폈다. 밀린 뉴스레터를 보는 것은 덤. 2012년부터 야구를 봤지만 하필 백수되기 직전 년도 팀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야구는 안봤다... (얘들아 올해는 안전하게 가을야구 해야지...)
여행에 취미에 각종 약속에 거기에 운전면허까지 정말 눈코 뜰새 없는 백수 초기를 보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쏟아붓다보니 진짜 몸이 10개라도 모자라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과로사할 것 같긴했어도 좋은 점도 있었다. '여유'
앞서 말했듯이 나는 주로 남들이 노는 곳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평일에 출근하여 내가 일하는 곳에서 노는 타인들을 보면 항상 신기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 시간에 여유롭게 있을까.. 너무 부럽다..에서 부러운 사람이 된 것이다. 평일 낮, 한산한 도로를 따수운 햇빛을 받으며 걷다니! 탈출한 도비는 항상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구! 취미가 일이 되어버린 사람이 다시 취미를 취미답게 돌리는 과정은 행복 그 자체였다. 큰 생각과 관찰 없이 즐거움을 즐거움답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과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논다는 상대적 여유로움은 백수생활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되었다.
(정말 몇 개만 올린 그 때의 사진들)
다시 회사원이 되어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은 또 다시 세상 돌아가는 이슈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취미와 일의 경계가 모호한 삶을 살고 있지만, 조금 지칠때마다 그 때의 추억을 돌이켜 보곤 한다. '맞아, 내가 이런 점 때문에 꿈을 키우게 되었지!'
앞으로 더 들려드릴 백수의 삶이 사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조급하고 우울하고 슬플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극도의 번아웃이 찾아왔을 때 잠시잠깐 아무 생각 없이 쉬며 내가 꿈을 꾸게 된 이유를 찾았던 순간은 지금도 나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잡덕은 여전히 새로운 업계에 들어가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을 꿈꾸고 있지만 (노력도 하고 있지만) 가끔 어떤 취미는 취미로만 남겨두는 것도 행복이 되지 않을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