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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서 Feb 28. 2021

정인이

양부모의 심리 2

정정한다. 지난 글에서 양부 또한 양모에게 정신적으로 지배당하고 있었던, 둘 사이에선 '피해자' 일 수 있다고 썼었다. 써놓고도 어딘가 찜찜했는데, 이제 알았다. 오히려 모든 원흉의 시작인 1번 가해자가 그임을 그 사람의 반성문을 보고 깨달았다.

우리가 뉴스에서 만난 아동학대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다양한 경우가 있지만, 엄마 홀로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 어려움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한 사건은 지긋지긋할 만큼 자주 등장해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형사적 처벌과 더불어 온갖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는 반면 아빠의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학대 주체인 엄마도 사실은 버림받은 사람이다. 아빠가 되었어야 하는 남성은 모두를 버린 첫 번째 범죄자다.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남은 절망감 막막함 분노, 그리고 실질적 어려움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미혼모다. 그 결과가 아동학대, 심지어는 유기라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보다 더 큰 죄를 지었고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하는 사람은 어딘가에 숨어있는 생부들이다.

비유하자면, 양모는 아이를 학대하는 미혼모였고, 양부는 엄마와 아이 모두를 버린 생부다. 안 씨의 반성문에 무책임과 무관심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그는 입양한 아이에게 무책임했고, 무관심했다. 그는 늘 첫째만 케어했고, 작은 아이가 학대받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경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이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보통의 부모는 아이가 아프면 자신이 더 아프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대신 아프고 싶다. 한데 이 사람은 정인이가 아파도 자신은 아프지가 않았다. 그러니 아이를 차 안에 혼자 두고,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양모에게 정인이가 거슬리는 존재였다면, 양부에게 정인이는 그냥 무존재였던 것이다.

이제야 분명해졌다. 정인이가 집 안에서 양모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동안 양부가 지켜주지 않은 이유, 아이의 숨이 이미 끊긴 상태에서 두 사람이 태연히 나눈 문자, 언론에게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학대를 숨긴 이유까지 말이다. 그는 아내에게 종속되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관심으로 무책임으로 아내를 더욱 사지로 몰아넣어 손 하나 대지 않고 정인이를 괴롭혔다. 나쁜 사람이다. 악마보다 더 악하다.

내내 담담하다가 반성문 말미에 친딸을 언급할 때는 글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걸 보니 그제야 가슴이 미어졌나 보다. 사람이 이럴 수 있나. 어찌 그리 친딸만 소중할까..

정인이는 인생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할 때, 사랑이 없는 사람들 손에 길러졌다. 그들은 아이를 때리고 굶기고 혼자 두기만 힌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말려버렸다.  아이들은 누구나 사랑만 받았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이를  사랑하는  말고는   있는 일이 없다는  한스럽다.


출처 https://duckming.com/bbs/board.php?bo_table=humor&wr_id=4957&sst=wr_hit&sod=asc&sop=and&page=23#r

입양하지 말걸 내가 왜 입양을 해서 우리 아내 고생시키고 우리 딸 울게 할까, 후회하는 내용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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