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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서 May 11. 2021

정인이

양조부모의 심리


너무 기가 차서 글을 안쓸 수가 없다.

정인이 죽인 양모가 시부모님에게 보낸 편지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 나온다.

'감사'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온다.

본인은 행복하단다. 많이 웃으시란다..;;


편지와 편지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면, 저런 며느리를 사랑하는 시부모는 과연 정상인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손녀를 죽인 사람이다. 그런데 사랑으로 지켜주고 계시다. 말이 되는가?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친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정인이는 가족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손녀를 죽인 사람을 인간 취급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이해 불가하다. 친손녀는 아니어도 사람이긴 한데, 어떻게 사람 하나를 죽인 한 살인자 며느리를 사랑할 수가 있을까? 심지어 그로 인해 아들과 친손녀의 인생마저 망가졌는데, 사랑?? 믿음과 사랑의 본보기??

구절구절 가관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조금의 방어도 하지 못하는 가녀린 아기 하나를 오랜 기간 학대해서 죽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 글만 보면 그녀의 가정에는 감사와 사랑과 믿음과 행복이 넘친다. 기가 막혀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가정은 딱 한 가지다. 조부모 역시 정인이가 죽기를 바랐다면 가능할 것 같다. 눈엣가시 같은 아이 하나를 대신 죽여주었고, 그로 인해 고초를 겪고 있는 며느리라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 같이 괴롭혔는데 혼자서 책임지겠다고 하니, 특히 나의 아들의 죄까지 뒤집어쓰겠다고 하니 그 며느리 오죽 이쁠까.

입양에 앞서 친조부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여름휴가를 즐기는 사진에서도 그들은 친손녀만 챙겼다. 하지만 초기의 반대가 모든  설명하지는 않고, 사진  장이 모든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므로 확대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생각했다.  속의 진심은 제발 조금이라도 아이가 가족의 사랑을 받았었기를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편지로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졌다. 양부와 양가 조부모들까지 하나였고, 정인이는 철저히 혼자였다.

 아이의 처절한 죽음이  사람의 도발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야 그들이 그토록 가리려  진실을 알겠다. 양모의 철저한 악행은 그녀를 사랑하는  가족의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살인 행각을 함께 해준 시부모님의 '멋진 아들'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대체 정인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죽어야 할 정도로 모질게 증오하고, 그 아이가 사라진 현재에도 그들 끼리는 서로 믿고 사랑하고 행복하단 말인가.


흔히 범죄에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범죄자에게 서사는 충분히 있을  있고, 그것을 헤아리는 것이 범죄의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범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장하영처럼  가족의 사랑과 응원을 충분히 받는 사람이  무시무시한 괴물이  수도 다. 악마의 씨앗을 품고 태어났다면 말이다. 선천적 범죄자라고   있을  같다. 동정의 여지가 1 없다. 막기는  어려울  같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는  말고는 방법을 모르겠다.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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