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의 학습
나는 대치동에 산다. 그러다 보니 교육열 투철하신 부모님들을 정말 많이 접한다. 본격적인 학습이 4살부터 시작된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부터 간담이 서늘했지만, 영어유치원이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어디 하나라도 들어가기 위한 부모님들의 치열함은 살벌하기까지 하다. 반면 내가 보내고 있는 발도르프 놀이학교에는 점점 원아수가 줄고 있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왜냐하면, 내가 아이를 발도르프에 보내는 이유는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더 잘했으면 해서기 때문이다.
대부분 부모님들의 목표는 의대 아니면 소박하게 인 서울이라고 하지만, 나의 목표는 실리콘 밸리다. 내 아이가 그저 공부만 잘하기보다는 창의적이고 용감하기까지 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물론 바라보는 종착점은 성공이고, 그 성공이 향하는 곳은 행복이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나도 아이가 부모의 곁을 떠난 후 행복하기를 절실히 바란다. 그래서 발도르프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성공 외에도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주체성',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주도성'이다. 진정한 행복은 주체적인 삶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이끌어나갈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끌려 나갔다면 아름다운 공원 나들이도 싫을 수 있고, 스스로 원했다면 힘든 공부도 즐거울 수 있다. 의대가 아무리 좋아도 모든 학생들의 꿈일 수는 없고, 의사가 되었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되었든 그 동기가 자신에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능력 발휘도, 느끼는 만족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두 아이가 내면의 동기를 동력으로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발도르프에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발도르프에서 창의성과 용기와 주도성을 어떻게 길러주는가? 별거 없다. 아이들을 최대한 통제하지 않고, 그들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이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씨앗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로부터 잘 심고 돌봐주기만 하면 커다랗게 움틀 수 있는 에너지를 느낀다. 그 에너지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발도르프 교육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거북이처럼 태어나서부터 혼자 살아나갈 수 없다. 고등 동물일수록 부모의 보호 안에 있는 기간이 긴 경향이 있고, 그 정점에 인간이 있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다만 방법이 다르다. 발도르프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입시키기보다, 아이들로부터 능력을 끌어내는 데에 집중한다.
발도르프에서 지적 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오해를 받는 것은 발도르프가 주로 유아 교육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발도르프에서 유아기에 지적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발도르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적기 교육'이다. 인간의 발달 과정을 면밀히 살피고, 그 시기에 맞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아직 논리적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학습을 시키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자칫 그 시기에 개발해야 정말 할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다. 유아기의 아이들은 놀이하면서 대근육 소근육을 발달시키고, 근육은 곧바로 뇌와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주체성 창의력 사고력 사회성까지 모두 놀이를 통해 개발된다.
그럼 발도르프의 아이들은 정말 자유롭기만 하고 놀기만 하느냐? 아니다. 발도르프는 리듬 생활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아침 열기와 모둠 놀이 시간에도 규칙과 조절력, 협동 등을 배운다. 7살이 되면, 조절력은 물론, 집중력과 창의력, 협응 능력 등을 모두 키울 예술 활동을 한다. 생각보다 발도르프의 아이들은 정말 바쁘다. 이러한 활동들이 나중에 힘든 공부를 이겨낼 수 있는 충분한 바탕이 되리라고 본다.
반면, 너무 일찍부터 시작하는 지적 교육이, 누가 더 오래 앉아있는가 하는 엉덩이 싸움이, 자라나는 아이들의 싹을 밟아버리는 듯하여 아프기까지 하다. 부모님들의 불안한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부모들의 넘치는 사랑과 책임감이 불안, 두려움, 욕심이 되어 아이들을 묶어버리면 아이들의 씨앗이 가진 힘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된다. 부모가 그 마음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아이 내면에 가진 능력을 더 크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발도르프 교육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아는 곳 중에 이러한 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을 돌보는 기관이 발도르프이거나 발도르프를 일부 받아들인 곳들 뿐이었다. 그래서 발도르프 킨더가르텐에 보내고 있다.
희망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발도르프와 생각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아기는 놀이 중심으로 계획이 짜여 있고, 영어 교육은 3학년부터다. 한글도 학교에 들어가서 배우는 기간이 늘어났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은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못한다. 혹시라도 내가 뒤처져서 내 아이까지 뒤쳐지게 하면 어쩌나 하는 책임감 가득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바라건대 파급력을 가진 대중매체의 전문가들이 부모님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교육에 관한 다른 관점을 보급해 주었으면 한다. 사랑하는 내 나라가 더 크게 발전하였으면 하는 절실한 마음에서 하는 바람이다.
요약...
1. 유아기는 그릇을 채울 때가 아니라 그릇을 키울 때.
2. 아이의 뇌가 가장 많이 발달할 때는 자유 놀이할 때.
3. 행복한 삶은 공부 능력보다 자기 주도성에 의해 좌우.
4. 한국의 교육열이 자라나는 싹을 밟는 것 같은 아픔.
5. 영향력 있는 누군가가 이러한 방향을 더 널리 알려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