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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인시 Oct 16. 2021

이례적인 일

프리랜싱 에피소드

    이례적인 일이었다.  

   <저작권 제한이 없는 만료저작물에 한해 제시 주제에 맞는 문학작품 속 문장 문단 리서치> 프로젝트였다. 이때만 해도 플랫폼을 통한 프리랜싱에 대해 막 눈을 뜬 상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핵심분야가 아니라도 기본기와 결만 맞다면 도전하고자 한다. 평소에 도서관에 밥 먹다시피 들락날락하다 보니 “문학작품”, “문장”, “문단”이 구미를 당겼고 전 직장의 부서 이름에 들어가던 “리서치”라는 단어가 친숙했다. 그래, 이건 해야 한다. 여태 해본 적 없는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고 하려면 무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자주 읽습니다. 오랜 유학생활로 영어 및 타 언어에 친숙합니다. … “로 시작했다. 또 한국에서의 전문이력 등을 들어보았는데 충분케 느껴지지 않았다. 덧붙였다.

“정말 다독하나 궁금해하실 것 같아 최근 도서대출목록을 첨부해 드립니다.” 마무리했다.


    한 달에 네댓 권이 몇 년간 모인 대출목록은 도서관이 멀든 가깝든 신발 밑창이 닳도록 들락날락한 그간의 기록이요, 여기에 가장 걸맞은 이력서였다.

  

    연락이 왔다. 간단한 통화와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일은 시작됐다.


    응답이 오자마자 집을 나섰다. 도서관 앞에 다다랐을 때 앞에 서서 저작권 만료저작물 요건에 맞는 작가 목록을 작성했다. 그 목록을 가지고 도서관에 가서 열댓 권이 되는 책을 우선 한번 쭉 훑었다. 제시 주제에 맞는 단어를 마음속에 몇 개 정해두고는 그것들을 눈알이 빠지도록 살펴 추려냈다. 네댓 권 정도 되는 책을 대출해왔다.

마르셀 프루스트, 오스카 와일드, 헨리 제임스, 귀스타브 플로베르, 제인 오스틴, 톨스토이 … …

제시 주제 안에서 이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에 맞는 문학 구절을 찾아야 했다. 기업의 홈페이지에 적힌 글, 페이지 내 삽화나 사진, 그리고 상품들을 훑어봤다.


    내가 생각하는 이 기업의 정체성과 이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한결인가. 이런 고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일의 순서가 이게 맞나. 평소의 일들은 나름의 루틴을 이미 세워둔 터였다. 따라서 맡게 되는 대부분의 일들은, 작업 의뢰가 들어오자마자 소요기간이나 견적이 턱턱 나온다. 이런 일들을 일정에 맞추거나 이에 대해 내 일정을 수정하여 안전하게 일한다.


    가장 겁이 나는 책의 첫 장을 들추었다.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이 책이 호러소설의 대명사라서 무서웠던 것이 아니라 그 두께에 압도당했다. 이런 책이었던가. 아! 그런데, 책을 넘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주제에 딱 맞는 구절을 발견했다. 벌써 쓸만한 것을 건져내다니. 그 구절을 따오기로 했다. 656 페이지, 마지막 장까지 눈알이 빠지도록 찾아 헤맸는데 낭패였다. 쓸만한 것을 더 이상 찾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딱 맞는 구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맥락의 흐름을 보아하니 생각했던 의미가 아니었다. 이건 못 쓴다. 밖을 보니 이미 컴컴했다. 오전 아홉 시가 되자마자 다시 집 앞 도서관엘 갔다. 더운 유월 여름날에 마스크를 쓰고 분주히 오갔다. 책을 골랐고 날랐다. 다시 학생이 되어 캠퍼스를 걷는 것이나 연구자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작고 잦은 마실을 즐겼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은 마주하게 될 책들과 신착도서 코너를 구경할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있었고, 돌아오는 길은 묵직한 책 다발의 무게로 팔은 조금 아팠어도 배가 불렀다.

 

    거장이 쓴, 또 고전이 된 책들을 양팔 가득 안고 왔어도 골라낸 구절을 엮어보니 결과물이 빈약해 보였다. 다른 사람의 돈을 거저로 취해서는 안 된다. 분명 열심히 일을 했다. 다만 그쪽에서 진정 쓸모없다 하면 그런 셈이라도 될까 겁이 났다. 문학 구절 찾기에 자격증이 있겠냐마는 사실은 이 일에 자격미달인 내가 덜컥 일을 맡아버린 것이 아닐까. 시간을 들이고 노동을 했다는 믿음보다 경험 없는 일에 대한 미지에서 오는 불확신이 더 컸다. 에잇, 어떤 항의라도 들어올 시 돈을 돌려주어야겠다고 다짐까지 해버리자 마음이 좀 나았다.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났다. 작업물의 최종본은 그런대로 완성이 되었다.

결과물을 전송했다. 불안해서 연락이 오나 스크린을 자주 쳐다봤다. 알림이 떴다.  

단숨에, 번개처럼 읽어나갔다.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결과물도 만족스럽고 다음 작업을 바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만족’을 보자마자 한숨을 돌리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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