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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인시 Oct 24. 2021

집은 메타포, 집안일은 명상


    일어난다. 창문을 열고 환기한다. 흐트러진 물건을 치운다. 설거지를 한다. 쓰레기를 버린다.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빨래를 돌리고, 말리고, 갠다. 냉장고를 정리한 후 주방의 카운터를 닦는다. 화장실을 정돈하고 닦는다. 반복한다. 알맞게 정리한 환경에서 하루를 시작하면 그날의 생산성이 오른다. 그런데 내키지 않을 때도 있다. 몸이 아프거나 지치거나 또는 마음이 그러할 때. 이런 때가 닥치면 며칠을 털썩 주저앉아 휴대전화 스크린을 몇 시간씩 쳐다보거나 지친 몸을 핑계로 샤워를 거르고 옷을 내팽개친다. 당장의 쾌락을 위해 집안일 체크리스트를 생략하게 되는 것이다. 질서와 동떨어지는 것이 일종의 보상이나 평소에 누리지 못할 유희를 주는 양 굴어봐야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안달 같은 불안이 방방 뛴다. 그런 탈선은 내게 자유를 주지 못했다. 어느 순간 분명해졌다. 집, 이 공간은 내 정신상태의 메타포 그 자체이다. 나는 메타포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이 안정적이지 않을 때 집은 어지러웠으며, 반대로 며칠 쌓인 설거짓거리를 보며 내면의 불안정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큰일을 하려거든 몸가짐부터 단정히 하라는 식의 교훈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목적도 없이 내 상태가 비유된 공간으로서의 집과 그것을 관찰하며 든 감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결과에 그 방점이 있다. 


    돌아가 보자. 내 속의 불안정을 눈치채게 한 밀린 설거짓거리로. 이것에서 회복하는 방법은 순리적 이게도 설거지하는 것이다. 수돗물이 흐르는 싱크 앞에 서서 그릇을 닦는 과정은 지루할 수 있다. 수건을 차곡차곡 개면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지는 않는다. 거울을 닦는 것은 소양이나 교양을 쌓는 것도 아니다. 물 묻힌 천을 들고 곳곳의 선반을 닦는 것이 새로운 도전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소일거리들을 리듬에 맞추어 해치워 나갈 때의 쾌감은 무엇일까? 마친 후의 성취감이 아닌 집안일의 리듬 그 자체에서 오는 것 말이다. 


    생산과 성취는 현대사회 (특히 자본주의적 측면에서) 최상위 덕목들임에 틀림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을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마저도 그러한 가치 판단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따라서 딴짓을 할 때면 일탈감과 함께 괜한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나에게 집안일은 '딴짓'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일과를 손에 잡고 싶게 하며, 그것에 탄력을 주는 회복 작용 때문이다. 비록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며, 오늘 한다고 해서 내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에 생산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도. 살아있는 한 나는 먹고, 마시고, 입고, 씻을 것이다. 따라서 집안일은 반복적이기 까지 하다. 그럼에도 나를 돌보고 공간을 정돈하는 것은 시시포스적 일과가 될 필요는 없다. 고백하건대 집안일을 할 때 나는 명상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 난해하고 멀게 느껴졌던 명상이 집안일의 과정에서 비슷하게 실천되기 때문이다. 매일의 집안일은 명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야간모드로 바꾸어봤자 결국에는 눈과 정신이 피로해지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과 그것이 주는 생산적이거나 비생산적인 각종 자극들에서 강제로라도 벗어나게 한다. 시작만 하면 두 손이 알아서 하는 반복적인 노동의 패턴이 리드미컬해지기 시작할 때 머리는 경건하게 비워진다. 며칠간 쌓인 설거짓거리, 하루 종일 쌓이는 정신적 노동은 손상이다. 설거지와 집안일이 가지는 리듬은 회복이다. 회복의 명상. 해가 뜨면 어김없이 집안일이 생긴다. 매일 회복의 기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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