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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인시 Oct 12. 2021

새 집으로 이사 후 두 번째로 산 것

    이건 내 계획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혼자 살게 되었다. 세 달 전 그날 혼자 살게 될 집에 물건을 실어 날랐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그러니까 혼자 살기 전에는 뉴스 정도나 보아야 혼자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그럴 때 독신의 내 모습을 상상한 적도 있었다. 안 좋은 것들이 떠오르곤 했다. 최근에는 이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도 내가 기억하기로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해 듣는 독신이나 독거 같은 단어들과 그에 대한 서사는 처음부터 곧이 부정적이거나 아닌듯해도 끝은 씁쓸하게 마무리하는 일종의 흐름이 있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골방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채로 라면만 자꾸 끓여먹는 모습이 떠올랐다. 라면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혼자 살면 라면만 먹게 될 것이며, 배가 불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닥치고 보니 매일 끼니를 지어먹고 처리해야 할 일과를 해내며 하루를 마무리 짓게 되는 것이다. 


    이삿짐을 풀기 전 집을 한눈에 담아봤다. 박스 몇 개를 제외하고는 하얀 공간 만이 가득한 산뜻한 광경이었다. 당장 사야 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첫 번째로 생각난 것은 화장지였다. 배가 고프면 어느 정도는 참으면 되고, 잠이 오면 하다못해 맨바닥에라도 자면 된다. 그런데 화장실에 갈 일이 생기는 것은 집에서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비상사태였다. 생각해본 적이 없음에도 화장지로 생각이 매끄럽게 흘렀다. 

또 화장지를 주문하는 것만큼이나 신속하게 대형 화이트보드를 주문했다. 대학생이 된 이래로 어디에 어떻게 살든 계획용 보드를 항상 마련한다. 사무실에나 있을법한 스탠드식 대형 화이트보드는 조금 비싸기도 하다. 그래도 망설임 없이 구입하기로 한 내 마음은 이 집에서 가장 볕이 잘 들고, 넓은 벽면이 있는 바로 앞자리를 그 보드에 내주었다. 컴퓨터 책상이나 텔레비전을 놓을 수도 있을만한 명당이지만 그렇게 했다.

명당이지만 그렇게 했다.


    자기 전 화이트보드에 다음날 계획을 적어둔다. 잠이 들라치는 순간이라도 계획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메모를 하고 생각을 고정해둔다. 계획용 보드가 멀리 있어 그까지 가기 귀찮을 때는 휴대전화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계획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정말 하기 싫은 내용을 봐야 할 때는 확인하고서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그 내용이 내 머릿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확인하는 과정은 내게 중요하다. 그것을 보아버리면서 이제는, 정말로 스스로를 속일 수 없겠구나—기억이 안 나는 체 군다든가—하는 압박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자고 일어나면 까먹게 되는 일도 많기 때문에 쓰고 확인하는 것은 유용하다.

자기 전 화이트보드에 다음날 계획을 적어둔다.

다른 것을 계획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것들이야말로 삶이라 했던가. 혼자 살게 된 것이나 개와 함께 사는 것을 계획한 적 없었다. 또 다른 중요하고 아주 큰 일들도 대개 그러했다. 그럼에도 계획을 멈출 수는 없다. 뒤늦게 떠올라 일을 망친 뒤에 그 망침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짜는 것은 훨씬 복잡하고 괴로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 없이는 허전해서 안 되겠다. 계획은 어느 때보다 지금 가장 중요하다. 어릴 땐 학기와 방학이 있었고 직장에 다닐 때는 업무시간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살 땐 끼니때와 같이, 언제나 모두가 모여드는 시간이 있다. 그런데 외부와의 조율이 거의 없는 혼자의 삶을 사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계획하고 그에 맞춰 살 수 있기도 하지만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무사한 하루가 모여 평범한 일상을 만들고 그중 어떤 사건들은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럴 때 그 나름의 결에서 다시 무사하고 평온한 날들을 만들기 위해 나는 보드를 마련하고 계획을 작성한다. 그러다 보면 다 잘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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