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기록한 사진 속 내가 그린 그림은 다소 파격적이다. 공주가 사는 마을을 정열의 빨간 장미로 표현하고 싶었던 그림도 증거로 남아있고 (불바다는 아니었겠지..)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엄마가 조언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사생대회에 가서 그리기에 집중하는 모습도 찍혔다. 어린이라면 무릇 그림을 안 그리고는 살 수 없었나 보다.
기록은 없지만 내 기억 속 첫 그림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엄마가 그려준 나의 모습이다. 하교 후 집에서 낮잠을 실컷 잤다. 다음날 미술 시간에 내야 할 자화상 숙제를 까맣게 잊은 채. 낮잠에서 깨고 저녁을 먹고 나서야 숙제가 떠올랐다. 내가 내 얼굴을 보고 그리면 되지만 하기 싫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응석을 부렸다. 짜증 내고 징징거리니 엄마가 혼을 냈다. 나는 더 기분이 나빠 숙제를 안 하겠다는 이상한 반항을 했다. 결국 엄마가 나를 달래며 그림을 그려주겠노라 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으려나.
엄마가 그린 내 얼굴을 보고 못 그렸다고 짜증을 냈다. 엄마는 화를 내며 자신이 그린 그림을 다 지웠다. 지우개 자욱이 가득한 그 종이를 엄마의 꿀밤을 맞아가며 바라본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 생각해도 엄마에게 참 미안한 일이다. 내가 나에게 실망한 기억으로도 오래 남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