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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Aug 10. 2023

남이 해준 밥의 위로


반년 만에 만난 좋아하는 친구가 귀여운 책을 추천해 줘서 빌려왔다. 빌린 책은 제목과 작가만 알고 있던 상태였는데, 뒤표지의 소개 글을 읽고는 놀라서 감탄했다. '남이 끓여준 라면이 제일 맛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나는 내 몫의 1인분 라면을 가장 맛있게 나를 위해 끓이는 삶을 살겠다'는 글이었는데,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거든. 자기가 끓이는 라면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그게 삶의 자세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당연한 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실은 책을 읽으면서도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아직 나는 남이 끓여준 라면이 제일 맛있다. 혼자 살아본 사람들은 더 강하게 느끼는 소감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중에서도 요리를 잘하고 또 자신의 요리가 책의 작가만큼 소중한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리고 내가 요리를 못 해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남이 끓여준 라면이나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


남이 해준 밥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몇 년 전 성남의 어느 초밥집에 갔던 일이다. 뚜벅이 출장에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잠깐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에 저녁 시간 치고는 꽤 이른 시간에 근처에 있던 초밥집에 무작정 들어갔다. 가게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그럴듯한 초밥 세트를 주문하고는 의자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잔뜩 지쳐서 눈을 감고 있는데 오픈형 주방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달그락, 달그락, 재료를 준비하는 소리, 그릇을 놓는 소리, 은은하게 퍼지는 고소하고 따뜻한 장국 냄새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때 생각했다. 누가 나를 위해 '밥'을 해준다는 건 이렇게 마음이 든든한 일이구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주방장이 나 한 사람이 먹을 요리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내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 그날 이후로 오픈형 식당에 가면, 사람이 없어 조용한 가게여서 달그락 소리가 나면 마음이 든든하고 따뜻하게 차오른다. 달그락 소리가 나면 괜히 친구에게 우리 밥 만들어 주시는 소리가 나! 라며 신난 기색을 내비친 적도 몇 번이다. 왜 그렇게 신이 나는지 그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쓰면서야 알게 된다.


자취하는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누가 밥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기혼이신 주부들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고, 나도 그렇고. 남이 해준 밥이 곧 보살핌처럼 느껴져서려나. 혼자 살고 오롯이 밥을 해 먹는 날이 길어질수록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하고 맛이 좋도록 간을 하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또 맛을 내가 신경 쓰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먹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되는 듯하다. 거기에 담긴 수고와 정성도 상상해 보게 된다.


스스로 제일 맛있는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싶기도 하다. 책의 소개말을 쓴 작가처럼 스스로를 오롯이 챙기는 삶이 멋지다고도 생각하지만 아직은 어렵고, 다른 사람의 정성이 아직도 필요하다. 혼자 먹는 밥은 재료도 그릇도 조리 기구도 최소한으로 대충 쓰게 되니까. 언젠가 나도 내 몫의 1인분을 가장 맛있는 삶을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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