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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Aug 18. 2023

기억을 지우는 저녁

내가 기억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야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매번 좋아한다고 노래를 불렀던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 한줄평은 '그 기억들을 가진 건 세상에 딱 둘뿐인데, 내가 아까워서 어떻게 잊나요 그걸.'이었다. 스튜디오 포비피엠에서 시그니처 칵테일인 너기모의 이름을 처음 봤을 때는 너무 놀라서, 마음에 콕 박혀버려서 처음 본 이후로 늘 주문했다. 이제는 도수가 약한 듯해서 잘 안 먹지만.


오랜만에 만난 좋아하는 친구에게 내가 기억력이 참 좋다고, 본인도 본인의 친구들 사이에서 기억력 좋은 편인데 본인보다도 더 기억력이 좋아서 놀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많이 웃었다. 그건 내가 당신을 정말 많이 좋아해서라는 걸 당신은 모를까? 사실 나는 회사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서 늘 팀원들의 챙김을 받는다. 일은 곧잘 하지만 일주일 전에 했던 업무 관련 일들 기억을 잘 못한다. 친구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한다는 뜻이야, 라는 말은 혼자서만 생각한다. 알겠지. 왜냐면 나도 그렇게 나를 기억해 주는 친구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추팔러와 지독한 미니멀리스트는 동시에 유지하기 어려운 자아다. 그래서 컨디션이 안 좋을 때 각 잡고 기록들을 많이 지운다. 사진이나 죽은 단체 대화방 같은 것들이다. 오늘은 사진 삼백 장 정도를 지웠다. 그렇게 정리한 사진에 담겼던 기억은 곧 흐려질 거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평소에는 잘 지우지 못하다가, '이제는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에야 지우고, 어떤 사진들은 몇 번의 정리에도 지우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지울 수 있게 된다. 이 사진은 이제 내게 필요 없구나, 하고. 그게 오늘은 사람이어서 기분이 참 묘했다. 가깝던 사람의 사진을 지워본 지가 한참만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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