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 중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2. 오늘 이순신은 조카를 만났고, 임금에게 편지도 쓰고, 친구인 남의길과 밤 새워 이야기하였습니다.
3. 진중에서는 삼각관계도 펼쳐지는데, 장수 이영남과 권숙이 한 여인을 두고 다퉜고, 그녀가 떠났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네요. 부하들의 연애문제까지 신경써야하니 이순신도 참 골치 아팠을것 같습니다.
4. 항왜 야여문도 등장합니다. 야여문 외에 남여문 등 여러명이 난중일기에 등장하는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왜란 이후에 북방에 배치되어 군인으로 계속 살아갑니다. 야여문, 남여문과 같은 항왜들을 결혼시킨 기록도 있으니, 아마도 그 후손들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5. 항왜 이야기는 별도로 묶어서 번외편으로 이어나가겠습니다.
오늘자 난중일기(1월 28일, 음력 1월 7일)
1592년 1월 7일
아침에는 맑았는데 늦게서부터 눈과 비가 번갈아 내리더니 종일 계속되었다. 조카 봉이 아산으로 떠났다. 남원 유생이 임금께 새해를 축하드리는 글을 가지고 가려고 들어왔다.
1594년 1월 7일
비 오다. 동헌에 앉아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저녁에 남의길南宜吉이 들어왔기에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늦어서야 헤어졌다.
1595년 1월 7일
맑다. 흥양 현감과 방언순方彦淳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해에서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이 와서 인사를 올렸다.
1596년 1월 7일
아침 일찍 이영남과 좋아 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이 집적거리기 때문에 피해서 왔는데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늦게 권 수사와 우후, 사도 첨사, 방답 첨사가 오고 권숙도 왔다. 오후 2시쯤 견내량의 복병장인 삼천포 권관이 급히 보고하기를, 항복한 왜인 다섯 명이 애산으로부터 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안골포 만호 우수와 공태원을 뽑아 보냈다. 날씨가 몹시 차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서웠다.
<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송찬섭 옮김 > 중에서
오늘의 인물 : 야여문(~ 1598, 본명 요여문)
원래의 이름은 요여문(要汝文)이었다. 조정에서 투항한 왜인(倭人)에 대해서는 후대(厚待)한다는 말을 듣고 투항을 결심하였다. 투항한 후에 귀화하였으며, 조정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검술에 능한 아동들 가운데 시재(試才)에 합격한 자들로 구성된 아동대(兒童隊) 중 일대(一隊)를 전담하여 훈련을 가르쳤다. 1598년 양호(楊鎬)가 이끄는 명나라 원군(援軍)의 경주(慶州) 진공작전에 가담하여, 왜군의 복장을 하고 정탐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여여문의 예를 통하여 임진왜란 당시에 항왜(降倭)들이 여러 방면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6087&cid=40942&categoryId=34332
조선왕조실록 기록 속 야여문
1594년 9월 18일
비변사에서 상에게 아뢰다. “항왜(降倭) 야여문(也汝文)은 취초(取招)할 때 보니 꽤 계려(計慮)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후하게 대우하여 그의 마음을 붙잡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사로 하여금 급속히 의복과 갓 등의 물건을 조치해 주게 하고, 또 사정(司正)의 고신(告身)을 주며, 형조의 적인(賊人)의 처로 짝을 지어 주어 위안시켜 힘을 다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599년 4월 16일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항왜(降倭) 야여문(也汝文) 등 10여 명을 북도(北道)로 입송(入送)해야 하는데 전마(戰馬)가 없어서는 안 되니 한 사람에게 한 필(匹)씩 사복시로 하여금 골라 지급하게 하고 의복 및 궁전(弓箭)·화약(火藥) 등속의 물품도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제급(題給)하게 하소서. 그 가운데 3명은 조총(鳥銃)이 없다고 하니, 도감이 간직하고 있는 세 자루를 모두 지급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