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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Jul 05. 2021

번아웃이 찾아왔다.

어느 날 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주말 오후.

아이들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를 봤다.

기분 좋게 영화관을 나오며,

휴대전화의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는 순간,

그분의 밀린 메시지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질문에 답이 없자,

“지금 뭐하냐? 전화기를 꺼 둔 거냐?”

라는 말을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평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솔직하게 답변을 했다.

“아이들과 영화관에서 영화 봤습니다.

전화기는 비행기 모드였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영화가 재미있었다며,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내 귀에는 오로지 그분의 목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메시지만으로도 느껴지는 리얼한 표현력을 보며,

브런치 작가 신청을 권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평일 아침.

한 동안 아침마다 뒷산 산책을 즐겼다.

새들의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들으면,

전날 들었던 험한 말들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기분 좋게 산책을 하고 돌아와

상쾌하게 샤워를 하면,

메시지 폭포 시간이 다가왔다.

출근하는 길 내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 같은 질책에 실시간으로 대답해야 했다.


그분도 분명 아침 출근길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낼 수가 있지?

멀티 태스킹 능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행복하지 않은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핸드폰에 ‘잡코리아’를 설치했다.

얼마 뒤, 잡코리아를 탓하며,

‘사람인’도 깔았다.

또다시 얼마 뒤, 사람인도 탓하며,

요즘 핫하다는 ‘리멤버’도 다운로드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그분의 파도와 같은 메시지,

아침마다 맞이하는 폭포와 같은 메시지를 피하는 방법을 피할  있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금요일 밤에도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고,

새벽에도 일하면 되었다.


너무 힘든 날에는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풀어준다는 음료도 마셔봤지만, 만성피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나는 방전이 되었고,

번아웃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번아웃인 줄도 몰랐다.

하지만 제목에 끌려서 읽던 책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번아웃 증후군은 1970년대 미국의 정신분석 의사 해르베르트 프로인데베르거(Herbert Freudenberger)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현대에는 직종과 무관하게 과도한 업무로 인한 ‘심신의 에너지 고갈’, ‘무관심 또는 냉소적’, ‘업무 성과 저하’의 증상을 보이면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한다.
- 나는 오늘도 소진되고 있습니다. (이진희 저)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은 참 현명한 사람이었다.


곰에게 쫓길 때에는

곰 보다 빨리 뛰는 것보다

옆 사람보다 빨리 뛰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옆 사람의 다리를 걸어 버리는

치밀함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회사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끝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할수록

나에게는 더 많은 일만 주어질 뿐이었다.

혼나지 않기 위해 시작한 주말근무, 야간근무가

밤샘근무로 이어지고 있었다.


회사에 나만 남아 있던 어느 날 새벽.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풀어준다는 음료도 없고,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나는 무너졌다.

젠가라는 게임이 있다.
처음에는 다들 거칠게 블록을 뺀다고 해도 블록은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기 때문에 괜찮다. 하지만 점점 블록이 빠지기 시작하면 남아 있는 블록들은 중심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남아 있던 그 많은 블록이 한순간에 다 무너진다.
- 나는 오늘도 소진되고 있습니다. (이진희 저) -
[아이들과 젠가 게임을 하는데, 내 회사 생활이 생각났다.]

몸이 많이 아팠다.

건강검진에서도 위험한 결과가 나왔다.

역설적으로 건강검진 덕분에, 나는 쉴 수 있었다.


“건강이 제일이야.”라고 말하는 그분에게,

“님만 없다면 건강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간신히 참고, “휴가 1주일만 쓰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뒤 조직이 변경되며,

그 분과 석별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물론 그분의 빈자리는 새로운 조직에서

다른 분이 잘 채워주셨다.)




처음이 아프다.

두 번째부터는 보다 슬기롭게 대응할 수 있었다.

체력이 강해졌다.

무엇보다 정신력이 강해졌다.


독서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위로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독서가 지혜를 주었다.

지혜를 통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혜가 쌓이고 나니,

문제를 사전에 피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독서가 나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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