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주제는 부동산인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오르고 있다..
집 값이 오른다는 것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이 제한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서 살고 싶은 것일까?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유현준 교수님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본다.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밥을 배급받아먹는 곳은 교도소와 군대와 학교밖에 없다. 학교는 점점 교도소와 비슷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군대는 2년이면 제대하지만 학교는 12년을 다녀야 한다. 공간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12년 동안 아이들을 수감 상태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꽃다발을 주기보다는 두부를 먹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전자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현대인들이 TV를 많이 보는 이유가 마당이 없어서라고 말했다. 마당에서는 사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변하고 시시각각 다른 태양빛이 들지만 거실에는 변화가 없다. 변함없는 벽지와 항상 똑같은 형광등 조명뿐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유일하게 화면이 변하는 TV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 아이들은 스마트폰과 게임에 빠진다.
건축과 관련된 사회학을 연구한 로버트 거트만에 의하면 ‘1,2층. 저층 주거지에 사는 사람들은 고층 주거지에 사는 사람보다 친구가 세 배 많다’고 한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똑같은 미국 사회인데 유독 혁신 기업들은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만 나온다. 애플과 구글도 캘리포니아에서 만들어졌다. 동부에서 혁신적인 기업이 나온 사례는 드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앞선 연구 결과를 근거로 유추해 본다면 캘리포니아는 지진 때문에 고층 건물이 적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물이 저층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친구는 세 배 많아지고, 세 배나 더 많은 생각의 시너지 효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미국은 부르즈 할리파보다 높은 초고층 건물을 지을 자본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세계 최고 높이의 빌딩을 짓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미국은 지금 누가 보더라도 세계 최강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에는 초고층 건물을 짓지 않는다. 미국의 초고층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시작하는데, 그 시기는 미국이 유럽에 열등감이 있을 때였다. 이후 소련과의 냉전 때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과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 같은 세계 최고 높이의 건축물을 지었다. 하지만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은 자국 내에 초고층 건물을 짓지 않는다. 과시하는 건축물은 주변에 경쟁자가 있는 자들이 짓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지어진 백 층 넘는 초고층 건물은 대만의 ‘타이베이 101’이다. 중국이 개방하면서 경제대국으로 치고 올라오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대만은 초고층 건물을 지었다. 이에 질세라 중국은 지금 도시마다 하나씩 초고층 건물을 짓고 있다. 중동에서도 초고층 건물을 처음으로 지은 국가는 가장 정치력이 약하다고 평가받던 두바이였다. 마찬가지로 초일류 기업은 초고층 건물을 짓지 않는다. 이런 정황을 보아 추측하건대, 피라미드를 지은 이집트의 파라오는 근방의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지은 것은 자신이 오랑캐라고 폄하하던 북방의 민족들을 실제로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남녀공학의 시대고 이성교제는 자유로우며 성 문화는 개방되었다. 사회는 이렇게 바뀌었는데 교회는 1980년대 공간에 멈추어 있다. 이제 교회는 가장 보수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교회 보기를 1980년대 청소년들이 절 보듯 한다. 한국 기독교의 젊은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인구의 도시 이동과 더불어 상가 교회라는 시스템으로 급속하게 부흥할 수 있었던 한국 교회는 지금 다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현시대는 종교인들의 자리를 심리학자, 뇌과학자, 인문학자가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요일에 종교 집회를 가기보다는 평일 저녁에 인문학 콘서트를 더 많이 간다. 아니, TV의 인문학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어쩌다 어른>, <알쓸신잡>은 이 시대의 상가 교회다.
영화 <블랙 팬서>는 겉으로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지만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시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의. 잠재적 위험이 만들어지는 방식 등 현재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자성하는 목소리가 담긴 영화다. 그중에서도 건축가인 필자의 마음에 가장 남는 이야기는 ‘벽과 다리’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주인공은 마지막에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라고 말한다.
자연에는 담장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동물들은 벽을 쌓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정치적 혹은 종교적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고 벽을 세우고 공간을 나눈다. 자연에 있는 유일한 선은 물과 땅이 바뀌는 강변이나 해안선 같은 것들뿐이다. 그나마 이 선들도 밀물과 썰물, 파도, 장마 등으로 끊임없이 변하면서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자연의 선과는 상관없이 명확한 국경선을 긋고 사람들을 오가지 못하게 한다. 이런 선들은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선이고 벽이다.
주말 저녁이면 ‘구해줘, 홈즈’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다양한 현실적인 이유를 핑계 삼아 아파트에만 살고 있는 나에게, ‘구해줘, 홈즈’라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다양한 집들은 대리만족을 하게 해 준다.
주말이면 산으로 바다로 캠핑을 간다. 캠핑을 통해 자연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땅을 밟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빛을 감상한다. 아파트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공감이다.
나는 어디서 살고 싶은가?
저자의 말을 통해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벽을 쌓지 않은 집. 자녀들의 창의력을 자극해 줄 수 있도록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집. 그리고 가족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공간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공간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가족들 간의 사랑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공간도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편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집의 외형을 갖추기에 앞서, 그 집에서 함께 사는 우리 가족들과의 사랑을 먼저 쌓기로 했다.
나는 사랑이 넘치는 공간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