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겸손함, 창의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최근 김경일 교수님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느끼고 있다.
(+창의성이 없는 게 아니라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경일 교수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읽어보게 된 책.
‘0.1%의 비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이야기들을 적어본다.
화병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을 때, 한마디로 나의 진가를 몰라줄 때 찾아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주로 주부들이 겪는 병이었어요. 평생 아내이자 엄마로, 며느리로 갖은 고생을 했는데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고 그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니까 허무하고, 억울하고, 한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요즘은 청소년들이 화병을 호소해요. 자기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는데 다른 사람, 특히 부모님에게 그런 자신의 모습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거예요.
하버드대 학생들은 비판을 기다리더라고요. 심지어 자신의 의견을 비판하는 사람한테 “thank you”라고 말해요. 그리고 그 내용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이런 학생들인 만큼 토론 수업을 참 좋아해요. 어떤 주제에 있어서 스스럼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그와 다른 의견을 귀담아듣습니다. 토론 수업을 할 때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학생들이 팽팽하게 맞서기도 하지만, 상대편의 반론을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또 한 가지 특징은 상대의 말을 듣고 나서는 반드시 “okay”라고 말한다는 점이에요. 자기와 다른 의견일지언정 우선 존중의 뜻을 표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내 생각이 남과 다를까 봐, 혹은 틀릴까 봐 걱정하지 않아요. 내가 틀려도 창피한 일이 아니고, 상대가 틀려도 비웃을 일이 아니에요. 자연히 어떤 의견이든 존중할 수밖에 없겠지요.
자존심이란 비교를 통해서만 충족되는 감정이에요. 내가 그냥 잘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내가 ‘남보다’ 잘해야 하는 거예요. 사실 아이들에게는 모두 그런 시기가 있어요. 아직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지적받기를 싫어하고 항상 자기가 이겨야 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가 틀리거나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많이 힘들어지겠지요.
자존심이 센 사람은 소유, 성취, 지위, 외모, 인간관계 등 모든 면에서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해요. 남보다 많이 가지고, 남보다 잘하고,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 남보다 예쁘거나 잘생기고, 남보다 인맥이 좋아야 해요. 그래야 만족합니다. 누군가를 이겨야만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열등감을 느끼기가 쉬워요.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거든요. 비교를 통한 만족감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요. 아무 조건 없이 스스로를 존중하기 때문에 주변 상황이나 타인의 시선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면이 탄탄하다는 건 바로 이런 거예요.
요즘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얘기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때 칭찬을 받아요. 그런데 집에 와서 “엄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하니까 엄마가 “스읍~!”하면서 말을 막아버려요. 왜 그러는 걸까요? 부모의 자존심이 낮고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아이의 말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스읍~!”하면서 눌러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님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부모님의 논리를 공격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거예요. 그냥 “그래? 네 생각은 어떤지 얘기해봐”하면 돼요.
내가 아이들보다 항상 많이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늘 옳아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자존감을 한 단계 높이는 방법이에요. 부모의 진짜 기쁨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몰랐던 것을 아이가 얘기해줄 때예요. 아이에게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부모는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꼰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신의 성공을 자꾸 ‘설명’해요. 그리고 실패는 ‘묘사’합니다. 설명은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켜야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듣는 사람에게 맞게 자기 이야기를 각색하게 되지요. 성공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어야 해요. 그래서 1인칭으로 얘기를 합니다. “그때 말이야, 내가 혼신의 힘을 다했잖아! 밤을 새워서 일하고, 거래처 대표를 찾아가서 3일 동안 기다리고 그랬어.”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죠? 듣다 보면 거의 신화예요.
그런데 실패 경험담을 얘기할 때는 그 일이에서 자기 자신이 쏙 빠져요. 갑자기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듯 당시 상황을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묘사는 그대로 기록하듯 말하는 거예요. 일단 중동에서 석유파동이 한번 일어나요. 미국발 외환위기가 닥치고,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그러면서 실패를 둘러싼 요인들만 말해줘요.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배울 게 별로 없어요. 사실 성공에 있어서 정말 우리가 알고 싶은 건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한 여건과 상황입니다. 성공을 이룬 사람의 투지와 노력에 관해서만 들으면 전혀 그런 정보를 얻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실패에 관해서는 그 사람이 무슨 실수와 잘못을 했는지, 어떤 점을 간과하고 혹은 빠뜨렸는지 들으면서 배워야 하는데 그냥 역사적 사건만 묘사하거든요. 그러니까 양쪽 모두 듣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지 못하는 거예요.
다음 세대에게 도움이 되려면 반대로 해야 해요. 성공은 묘사하고 실패는 설명해야 합니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어요. 성공한 경험에 대해 말할 때는 “내가 그때 운이 참 좋았어”라고 합니다. 당시 법규가 어떻게 바뀌고, 국제 정세는 어땠는지 얘기를 해줘요. 듣는 입장에서는 ‘아, 일을 할 때는 그런 상황을 대비해야겠구나’하면서 굉장히 좋은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실패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설명을 하는 거죠. 자기가 뭘 제대로 안 했는지.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말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그런 부분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세계적인 언어심리학자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는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 지구 상에서 한 번도 예외 없이 일어났던 일이 있다. 모든 세대는 그 이전 세대보다 더 지혜롭고 다음 세대보다 덜 지혜롭다.”
우리 뇌 속에는 아난다마이드(Anandamide)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있는데, 이게 많이 나오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래서 ‘몸속 마리화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불안한 기분이나 스트레스를 줄여주거든요. 이 아난다마이드가 분비되는 양을 따져보니까 나이지리아가 1등이었어요. 대한민국은 76위입니다. 현재까지 76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측정했거든요. 즉, 꼴찌라는 거예요.
아난다마이드 분비량 순위는 해당 국가들의 낙천성 순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전혀 낙천적이지 않은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이지리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 눈에는 그 사람들이 게을러 보여요. 그런데 사실 그분들은 게으른 게 아니라 낙천적인 겁니다. 낙천적이라는 게 뭘까요? 낙천성의 핵심은 적게 가져도 쉽게 행복해지는 거예요.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볼까요? 전 세계에서 가장 낙천적이지 않은 한국 사람들은 아주 많이 가져야 행복해진다는 뜻입니다. 많이 성취해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죠. 많이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다들 정말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익숙함은 수많은 해프닝을 만들어냅니다. 1565년에 세계 최초로 연필이 발명되었어요. 연필은 인류 역사에 남을 만한 혁신적인 필기구입니다. 우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드디어, 쓰고 난 뒤에 지울 수 있는 필기구를 가지게 됐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지우개가 그보다 200년이나 지나서 발명됐다는 거예요. 인류는 연필을 발명해놓고도 무려 200년 동안이나 조심스럽게 글씨를 썼어요. 틀리면 종이를 버려야 했던 거지요. 더욱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연필과 지우개가 만나는 데는 그보다 100년이 더 걸렸다는 겁니다. 연필도 있고, 지우개도 있는데 ‘연필 위쪽에 지우개를 달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해내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이 걸린 거죠.
저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어떤 직업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직업에서 기계적인 일만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죠. 기계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의사, 기계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 기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자는 없어질 거예요. 대신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소통할 줄 아는 의사와 판사, 교육자는 오히려 더 귀해지겠지요. 그건 기계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다운’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춰야 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든 익숙함을 버릴 수 있는 사람, 다른 분야에서 단서를 가져올 수 있는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면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에만 머무르는 대신 넓은 시야를 갖추고 지혜를 쌓아가야 하겠죠.
우리는 지식을 늘리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계속 새로 배워야만 똑똑해진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도 그런 공부를 강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지식은 참 많아요. 정보가 넘치는 세상이다 보니 꼭 책을 읽지 않아도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별의별 지식을 다 얻거든요. 하지만 지식이 있는데도 그걸 꺼내지 못해요. 그리고 널리 활용할 줄도 모릅니다. 지식만 있고 지혜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창의적인 생각을 해내지 못하는 까닭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지식을 가져다 쓰지 못해서 그래요. 창의적인 인재가 되려면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특별한 전문가가 될 것입니다.
이타적인 사람은 자기보다 한참. 지식이 떨어지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의 질문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그 질문들은 대개 본질에 관한 거예요. 거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그 내용을 다시 상대가 알아듣기 쉬운 말들로 설명해줘야 합니다.
아인슈타인과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학에 있어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깊고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대학 신입생이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강연하기를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물리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들었던 사람들에게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전기역학 같은 걸 설명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스스로의 틀을 깼던 거예요. 상자의 단서는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을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척’하면서 살아간다.
‘있는 척, 아는 척, 멋있는 척 등.’ 우리는 왜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것처럼 행동할까? 이 책에 따르면,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작은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작은 성취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낄 수 있다. 평가의 기준이 외부에 있으면 우리는 항상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나보다 잘 나고, 나보다 돈이 많고, 나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성과는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해야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행복감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아닌, 내 마음속의 절대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만큼 갖지 못한 것이 기준이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발전한 나의 모습, 그리고 발전과 행복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서 삶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
‘~척’하면서 살아가면, 실제로 ‘척척!’해내는 사람들보다 행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