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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May 22. 2023

쿠팡에는 결재판이 없습니다.

쿠팡은 어떻게 최고의 기업이 되었나?

쿠팡을 떠나 새로운 회사에 입사를 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 2가지를 꼽아보자면,

첫째는 결재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모든 서류를 출력해서 상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장담하건대 새로운 회사에서 한 달간 사용한 A4용지가, 쿠팡에서 수년간 사용한 A4용지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쿠팡의 모든 서류는 온라인으로 공유됩니다.

상대방이 같은 소속 조직이 아닐 경우에는 이메일로 파일을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파일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기도 하고,

대부분의 파일들이 Dash-Board 형태로 제작되다 보니,

최근에는 공유폴더를 통해 파일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의 파일을 담당자 1명만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작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0년대 중후반에 회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사무실 책상마다 결재판이 10개 이상씩은 쌓여 있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책상 위에 결재판이 별로 없으면 "요즘 한가한가 봐?"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일부러 의미 없는 결재판을 여러 개 쌓아 놓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각 부서의 막내사원들은 매일 결재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막내사원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인사씨, 결재판 하나만 줘봐"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결재(품의) 제도에 많은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5명이 넘는 결재권자들은 결국 서류에 서명(sign)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일은 기안자(=주로 막내)가 다하고, 중간 서명자들은 시키기만 하거나 결재란에 서명만 하는 것이 전부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있던 조직의 몇몇 중간 서명자들은 정말 하루종일 서명만 했습니다.)

업무에 대해서 아직은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막내사원들이 열심히 서류를 만들고,

중간 관리자들은 빨간색 사인펜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수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빨간펜 선생님이라는 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쿠팡은 다릅니다.

쿠팡은 해당 분야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가 서류를 작성합니다.

Level이 낮은 직원에게 서류를 작성해 오라고 시키지 않습니다.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료는 직접 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재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공유를 합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만든 서류이기 때문에 그만큼 완성도도 높습니다.

유관부서도 공유만 받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전사적인 차원의 의견을 덧붙입니다.

의견을 덧붙이는 순서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내가 관련된 분야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파일을 수정하여 재공유하면 됩니다.

(물론 지금은 공유파일로 실시간으로 여러 사람이 수정하는 것을 함께 볼 수 있으므로, 재공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어느 대기업은 기존의 전자결재 시스템을 모두 폐지하고 e메일로만 결재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주요 의사결정 사안의 경우 실무자가 팀장, 이사, 본부장, 사장에게 한꺼번에 결재요청 e메일을 보내면, 의사결정권자들은 전체 답장 버튼을 눌러 해당 안건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는 것으로 결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팀장부터 시작해서 사장까지 순차적으로 결재를 받는 것에 익숙했던 구성원들은 도입 초기에 꽤나 혼란스러워했다고 한다. 팀장들은 그들 나름대로 처신하기 어려워 곤혹스러워했다. 상급자가 먼저 찬성해 버리면 하급자인 팀장은 반대의견을 내놓기가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팀장이나 임원들도 상위 결재권자의 의견과 상관없이 점차 실시간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게 되었고, 이것이 의사결정의 속도를 몰라보게 높였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눈여겨봐야 할 점은 따로 있다. 이 기업에서 혁신한 것이 단순히 '속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의사결정권자들의 수평적인 의견 교환을 유도함으로써 궁적으로 목표 달성을 위한 의사소통을 개선했다. 결재서류가 층층이 올라가는 기존의 체계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구조다.
 그런 점에서 이 회사의 새로운 결재시스템이 궁극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무엇일까? 의사결정의 속도가 아닌, 직책이나 직위에 관계없이 활발히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성과책임 중심의 사고방식'이 아닐까? (P.139)
 -  제대로 시켜라 _ 류랑도 지음 _ 쌤앤파커스 출판사 -




결재는 내 서명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표현입니다.

하지만 결재란의 서명은 하나같이 필기체로 흩날려 써져 있습니다.

누구의 서명인지? 시간이 지나면 알아보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결재란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결재란에 있는 서명자 모두가 각자 내용을 보았다는 기록일 뿐입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최종결재자(=전결권자)가 책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중간 관리자들을 비난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들도 확인하지 않고, 서명한 것이냐?"라고 말이지요.


쿠팡은 그 문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문제의 원인부터 해결방안까지 모든 내용을 정리하여 이메일로 공유를 합니다.

그러면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결재를 하는 일반조직에서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되려 문제를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해결방안을 마련해 나가는 쿠팡의 조직문화가,

책임소지를 따질 일조차 만들지 않는 쿠팡의 성공비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쿠팡에는 결재판이 없습니다.

쿠팡이 계속해서 성장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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