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삼계: 세 개의 세계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Real)ㅡ 이렇게 총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힌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 세계는 서로를 교차시키며 주체의 분열과 욕망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주체의 구조를 형성한다.
라캉은 이 삼계를 ‘보로메오 고리(Borromean knot). 세 개의 고리가 서로 얽혀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가 풀려버리는 구조’로 비유했다. 인간은 세 가지 세계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대개, 상상과 상징이 엮어낸 세계를 현실이라 믿으며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부터 실재가 조용히 그 믿음에 금을 내는 것이다.
첫 번째, 상상계다. 타인의 시선과 표면 위에 떠오른 형상을 통해 자신을 동일시하는 차원이다. 아이는 자신이 ‘보여지는 대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타인의 눈에 비친 모습, 부모가 기대하는 형상, 친구들이 좋아하는 태도를 따라 자아를 세공해간다.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보다,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고민한다. 아이는 자기 자신을 통합된 주체로 착각한다.
두 번째, 상징계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름을 부여받고, 가족 안에서의 위치, 사회가 허락한 말들 속에서 자아를 형성해간다. 그러나 언어는 언제나 결핍의 구조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조차, 그 말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다.
말과 말 사이, 의미와 의미 사이에는 늘 미끄러지는 틈이 존재한다. 우리는 상징계에서 직급, 직함, 소속 같은 것들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한다. 나는 OO회사에 근무하는 팀장 OOO이며, 이 조직의 이 부서에 속해 있고, 나의 위치는 여기쯤이다—이런 식의 언어적 위치 지정을 통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감각을 확보하려 한다.
타자와의 대화 역시 철저히 상징계의 언어 위에서 이루어진다. 명함에 적힌 이름, 직함, 직책. 우리는 그것들로 자신을 증명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며, 삶의 의미를 안정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구조는 결국 언어의 질서 속에서만 유효하다. 즉, '팀장 OOO'라는 정체성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기표에 불과하다.
그 기표가 벗겨지는 순간—예컨대 조직을 떠나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타자와 마주하는 순간—우리는 자신을 규정해주던 상징의 틀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비로소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말이 멈춘다.
라캉에 따르면 실재계는 상징화될 수 없는 것, 기표로 포착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의미 이전의 충격이다. 언어의 보호막 없이 세계에 내던져졌다는 감각을 몸 전체로 겪는 것. 언어는 상징계에 속해 있으며, 다시 돌아오려면 말을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실재를 통과한 이후의 말은 이미 찢겨 있다.
실재계의 느낌은 상징계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 다만 도래한다. 설명하거나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를 통과할 때—예기치 않은 침묵, 설명할 수 없는 눈물, 혹은 언어가 멈추는 순간—우리는 그 존재를 느낀다. 실재계는 상상계의 이미지도, 상징계의 언어도 포획할 수 없는 균열의 자리다.
감각이 예민하거나, 시대를 앞서나간 통찰력을 지닌 일부 철학자나 시인, 예술가들은 이러한 감각들을 예술로 승화시켜 상징계의 언어로 적당히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저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실재를 마주한 사람은 두 갈래에 선다.
하나는 그것을 ‘기분 탓’이라며 다시 상징계로 밀어넣고, 언어의 보호막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안락하게 살아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부조리를 감당하며 말해지지 않는 무언가와 함께 살아가는 길이다. 실재는 종종 설명되지 않는 직관이나 촉감처럼 스쳐간다.
이런 경험을 인과관계로 연결하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단순한 기분 탓으로 넘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실재는 상징계의 언어로 설명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 언어 안에서 무너지고 있음을 감지하는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스스로의 의지로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삶을 가볍게 무너뜨릴 만큼생생하고, 동시에 감당하기엔 너무 무겁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앞에서 주저앉는다. 그리고 다시 상징계의 언어 속으로, 질서 있는 세계의 말들 속으로 숨는다.
실재를 계속 응시하거나 지나치게 받아들이면, 결국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사람은 미쳐간다. 그리고 그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솔직하게 말했을 때, 과연 이해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사실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혹은 감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징계의 언어에 가까운 형식을 취할 때에만, 가까스로 이해받을 수 있다. 제 정신을 유지하려면, 그런 교묘함이 필요하다.
재미있게도, 알베르 카뮈는 이와 관련된 언급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부조리를 마주한 인간—즉 실재계와 상징계 사이의 무너져내림을 감각하는 자들—을 위해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그런데, 내가 미쳤거나, 나를 제외한 모두가 미쳤다고 믿는다면 죽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서 카뮈는 말했다.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ㅡ부조리한 삶, 끝이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ㅡ 여기서 자살은 생물학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사회적 자살'까지도 포함한다고 본다.
언어보다 정확하게 방향을 인도하는 듯한 무언가의 기류—그러나 결코 언어로는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 그것들. 처음엔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될 때, 사람은 자신이 겪은 그 감각들을 하나하나 말로 옮기려 든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계의 언어로 완전히 번역될 수 있었다면, 라캉이 굳이 세계를 구분할 필요도 없다.
카뮈의 두 번째 선택지는 초월적 환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막연히 믿거나, 본인의 답 이외에는 모두 무시하면서 존재하고, 두려움을 외면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반항이다. 부조리를 살아가는 것. 신념에 의해서, 이해받지 못하면서, 그럼에도 모순과 체계에 반항할 용기. 이것이『이방인』의 핵심 내용이었다.
한편 라캉은 조현병을 겪는 주체들을 상징계의 결정적 실패를 경험한 자들이라고 보았다. 상징계에 필요한 결정적 기표가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본 것이다. 한 마디로, 세계를 감각으로 조직하거나, 자신을 타자 속에 자리매김할 수 없는 형태라는 의미다.
따라서, 그들에게 실재는 필터 없이 들이닥치는 감각이 될 것이다. 그것은 환청, 과잉 의미화 같은 방식으로 도래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슈레버는 놀랍도록 이성적인 고등법원 판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신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육체가 여성으로 변형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광기의 한복판에서 치밀한 논리를 구축하며, 자신이 어떻게 ‘신의 질서’ 안에 편입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것이『한 정신병자의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적 해석(1911)을 써낼 정도로 언어, 자아, 세계 간의 구조를 탐구하는 핵심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즉, 라캉에게 있어서 슈레버의『한 정신병자의 회고록』은 상징계가 무너진 자가 실재와 직접 맞붙으며, 언어를 무기로 세계를 다시 만들어보려는 절박하고도 실패한 시도의 기록이다. 슈레버는 수많은 감각들을 표현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상징계의 언어로 조절하고 전달하는 데 실패한 주체였다.
상징이 놓친 자리는 의미가 붕괴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가 과잉되어 터져 나오는 장소다. 그 과잉은 때로는 경건하고, 때로는 파괴적이다. 그래서 그 감각이나 현상들을 언어로 붙들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이는 시를, 사유를, 철학을 하며, 어떤 이는 정신과의 진단명 아래에서 무너진다.
1) 실재계와 시인에 대한 해석: 말라르메는 "이 세상의 사물들은 존재하지 않기 위해 이름을 가진다"고 말했다. 즉, 언어가 실재(사물)을 은닉하는 동시에 호출한다는 이중 구조를 드러내는 것. 따라서 시는, 실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모순적인 형식이다. 이를 라캉의 해석과 연관지어 보면, 그가 언어의 침묵 위에 언어를 세우는 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리쾨르는 은유를 기표들의 새로운 배열을 통해 기존의 의미론적 틀을 뒤흔드는 행위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시란, 기표와 기의의 조합을 이탈시킴으로써 실재의 충격을 간접적으로 호출하는 형태이다. 이 맥락에서 슈레버는 실패했다. 그는 실재의 감각을 그 자체로 언표화하려 했으며, 상징계의 기표 구조를 우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버린 자폐적 텍스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2) 비트겐슈타인: 그는 논리-철학 논고의 제 7명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조언이다. 말할 수 없음을 기호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해야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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