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연 Oct 29. 2020

Where I belong …

[물감과 타이프]

나만의 속도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서정연


한 줄을 읽고 나서 고개 들어 먼 곳을 바라본다. 잠시 후에 또 한 줄을 읽고 이번에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글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가는 건 우연한 문장들이 나를 멈춰 세우고 오래도록 붙잡는 글이다. 그런 문장을 마주하게 될 때면 나는 책장을 넘기는 대신에 가만히 덮고 그것이 나의 몸속 어딘가에 자리 잡기를 기다린다.


영화를 볼 때도 사정은 비슷하다. 방금 막 지나간 장면에서 분명 무엇인가가 나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러나 나는 다음 장면으로 섣불리 넘어가고 싶지 않다. 조금만 더 그것에 머물고 싶다. 몇 초 전에 맞닥뜨린 그 무엇인가를 더 음미해보고 싶다. 하는 수 없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스크린과 나 사이에 자리한 허공을 응시한다. 달리 눈을 둘 데가 없어서 그렇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나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밤이 되면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술집에서 나와서 예의를 갖춘 복장으로 몸을 정제한 다음, 서재로 들어가네. 그곳에서 나는 옛 사람들의 친절한 대접을 받고 부끄럼 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묻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내게 대답해 준다네. 나는 그 시간 동안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지. 나는 그들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니콜로 마키아벨리)


내가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종종 생각해본다. 나만의 속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게 가장 적합한 영역이 어디일지를. 책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 역시, 그것을 읽을 때만큼은 주도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속도를 내가 조절하고 싶었다. 천천히, 아주 깊게. 지금 눈으로 보거나 읽고 있는 것이 내 몸속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톨 하나하나에 새겨지도록. 그런 느릿한 사람에게는 언어로 직조해낸 세계, 단어와 문장들이 그것을 읽는 이의 무엇과 부드러운 마찰을 일으키고 자꾸만 멈춰 세우는 책의 세계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지 않을까.

이전 13화 간이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