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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Oct 17. 2020

드로잉 일기 (2)

[물감과 타이프]

길을 걷다가 아무 데나 주저앉아 그림만 그리고 싶던 하루 ⓒ서정연



틈날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나에게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계속해서 손을 움직이는 걸 의미한다. 끊임없이 손을 놀리고 있을 때에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희열과 함께 어떤 안정감을 느끼곤 하는데, 심지어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 때조차 습관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리니까. 만약 손을 그토록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만들어 주는 다른 종류의 활동이 있었다면, 굳이 그림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종이와 연필이 눈에 띄면 별다른 생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아무 거나 그리기 시작한다. 드로잉을 하기 전에 취하는 별다른 행동이나 의식 같은 건 없다. 그런 게 없기 때문에 그토록 자주 무엇인가를 그려댈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연필심이 다소 뭉툭하더라도 도저히 쓸 수 없게 될 때까지는 그냥 사용한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고요한 마음으로 먹을 간다든지, 차분하게 연필을 깎는 행위 같은 건 나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종이에 그려지는 것들은 대개 무용하고, 심오한 의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먹다 남은 빵 조각,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컵,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온갖 물건들, 나조차도 누구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는 사람의 얼굴,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수한 것들…….


집이나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나는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한 장 찍어 남기고는 종이를 구긴 뒤 휴지통에 버리곤 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었다. 왜냐하면 드로잉은 그 자체로, 나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순수한 기쁨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으로서만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때이자, 머릿속 복잡한 활동이 일시에 멈추는 아주 고요하고도 뜨거운 순간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종이와 연필은 모두 제 소임을 다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언제고 드로잉이라는 행위에 마음을 기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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