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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Oct 26. 2020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물감과 타이프]

나는 아직도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서정연




“나는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언제나 꿈꾸었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그리고 가난하게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_ 장 그르니에, <섬> 中




대학을 졸업한 이후 열여섯 번째 이사를 얼마 전에 마쳤다. 송파에서 강서로, 거의 서울의 끝에서 다른 끝으로 옮겨왔다. 혼자 짐을 싸고 이사업체를 통해 옮긴 다음, 다시 혼자서 풀었다. 새로 도착한 곳에 이삿짐을 늘어놓고는 곧바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첫날밤은 그냥 맨 바닥에 누웠다. 한쪽 벽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창문으로 가로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설핏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공간에,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여기저기 쌓아놓은 상자들 사이에, 나 역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짐짝처럼 놓여 있었다. 뭔가 막막하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했다.


스물다섯 살 무렵부터 감행했던 이사니까 어림잡아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옮겨 다닌 셈이다. 이삿짐을 꾸리고 정리하는 데는 도가 텄다. 갖고 있는 물건들이 워낙 적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꺼운 종이로 된 택배 상자를 몇 개 사서 무게를 고려해 책과 옷가지를 적절히 배분한 다음, 테이프로 마무리하면 끝. 그렇게 대여섯 개의 상자들과 함께 나는 종로, 관악, 마포, 송파, 강서, 일산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옮겨 다녔다. 대개는 열 평을 넘기지 않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원룸이나 투룸이었고 세탁기와 냉장고, 에어컨 등이 갖춰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사를 한다고 해서 내 인생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출발할 수 있으리라는 어렴풋한 희망 정도? 부쩍 줄어든 통장 잔고와 바닥난 체력은 내가 다시 채워 넣어야 할 것들이었다. 돈이나 시간이 남아돌아서 재미로 이사를 다녔던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때가 되면 이동하는 철새처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는지 묻는다면 글쎄, 뭐라고 답해야 할까. 멀쩡히 살고 있던 집에서 집주인이 갑자기 방세를 올리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었고, 목돈이 필요해 방 보증금을 빼야 한다든지 직장을 따라 옮겨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안도감 때문에?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며 정착이라는 것을 할 때에, 바로 그 순간부터 몸에 쌓이기 시작하는 삶의 무게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결코 어딘가에 다다르고 싶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싶어서? 아니면 정말 몸속에 유목민의 피라도 흐르고 있나? 나로 하여금 그 많은 날들 속에 짐을 쌌다, 풀었다 하며 지난한 이사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도록 만든 동력은 무엇일까? 나 역시 이유가 궁금하다. ‘이사가 취미’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시절은 가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로만 횟수를 줄이게 된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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