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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Oct 29. 2020

잠, 때때로 절망

[물감과 타이프]

잠은 때로 깊은 절망을 의미한다. ⓒ서정연


“자꾸만 잠이 온다. 자면 잘수록 더 많은 잠이 찾아온다. 잠이 나를 덮친다. 시도 때도 없이 자다 보면 깨어있는 상태와 잠이 든 순간을 뚜렷이 구분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스스로 무한 증식하며 사람을 집어삼킨다는 점에서, 잠은 때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과도 닮아 있다.”


이 글을 쓸 무렵, 나는 끝 모를 무기력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를 온전히 깨어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자고 또 자고만 싶었다. 무엇인가에 완벽하게 진 기분이었다. 그럴 때의 잠은 명백히 현실로부터의 도피이자, 지독한 절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든지 감당이 쉽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술잔을 기울이는 대신에 어둑한 방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하곤 했다. 잠은 나에게 유일한 도피처이자 해방구, 깊은 위안을 안겨다주는 안식처였다. 자는 동안만큼은 복잡한 생각도, 쓸데없는 고민도 사라졌으니까. 대낮에 암막 블라인드를 내린 방에서 가끔은 이불도 펴지 않고 나는 맨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벽지의 희미한 무늬라든가 허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스르르 잠들었다.


잠들기 위해 허름한 이부자리 속으로 몸을 구길 때마다 내 몸에 맞춤하게 만들어진 작고 딱딱한 나무로 된 관에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입구를 닫아버린 네모난 관 안에서 나는 세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격리되었고 어쩔 때는 해방감에 도취되었으며 딱히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씁쓸하고 비릿한 감정을 마주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썼던 잠에 대한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나는 더 이상 많은 것들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내가 탄 배가 서서히 침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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