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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Oct 22. 2020

드로잉 일기

[물감과 타이프]

언젠가는 이렇게 큰 그림도 그려보고 싶다. ⓒ서정연


우선 내가 한 번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어렸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동네 미술학원을 다닌 적도, 어른이 된 후에 성인 미술반이나 화실 주위를 기웃거려 본 기억도 없다.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든 미술 수업시간마다 교탁 위에 놓인 사과를 그린다든지,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교과서에 실린 자그마한 그림으로 감상한 게 내가 미술에 대해 배운 거의 전부다.


그런데도 나는 늘 손을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그려대고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심심하거나 일상이 무료하게만 느껴질 때. 외롭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 지금 눈앞의 공백이 허전해서 견딜 수 없을 때. 그 어떤 것도 도저히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 바로 그때에, 나는 ‘그린다’는 인식조차 없이 숨을 쉬는 것처럼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래,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돌이켜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예닐곱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는 건 나에게 즐거운 놀이이자 기쁨이었다. 매일 스케치북을 한 권씩 갈아치울 만큼 틈만 나면 계속해서 그렸고, 더 이상 그릴 종이가 없어지면(엄마가 항상 스케치북을 사주진 않았으니까) 집 안에 굴러다니는 이면지라든가 떼어낸 달력이 나의 캔버스가 되었다. 학창시절 내내 교과서나 노트의 귀퉁이는 자그맣게 그려 넣은 낙서로 채워졌고.


그렇게 좋아하던 그림을 한동안 그리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대학에서 다른 걸 전공하고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였다. 가끔 통화를 할 때나 회의시간에 허전한 손을 놀리느라 하는 의미 없는 낙서만이 내가 무엇인가를 그리는 전부가 되었다. 그럴 때면 버릇처럼 스케치북을 펼쳐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던 예전의 내가 아주 오래된 전생의 기억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불면증으로 잠을 못 이루고 신경과에서 처방해준 약마저 듣지 않던 어느 밤, 더 이상 기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난데없이 종이와 연필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매일 그린다.


“고독하지 않았다면 한 장도 그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어느 화가의 말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토록 내 삶이 막막하고 불안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마다 나에게는 그림이 있었다. 언제든지 나를 기다리는 흰 종이의 넉넉한 품이 있었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고, 마음 한 구석에서부터 서서히 번져오는 기쁨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줄곧 그리는 행위에 기대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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