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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Oct 21. 2020

빛에 관하여

[물감과 타이프]

나에게는 많은 빛이 필요치 않다. ⓒ서정연


해가 진다.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 씻으러 향한다. 벽면에 난 손바닥만 한 창으로 오후의 마지막 빛이 들어와 화장실 안을 밝히고 있다. 금방 어두워질 것이다. 나는 샤워를 시작한다. 전등을 켜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지 한 줌의 빛, 눈앞의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빛이면 충분하다.


나는 결코 많은 빛을 바라지 않는다. 만약 내 집 어딘가에 번쩍거리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면 당장 그것을 떼어서 내다버릴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환한 것들을 나는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를 낱낱이 드러내는, 무참히 쏟아지는 저 빛들을 나는 차갑다고 느끼기 때문에. 빛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차가움을 싫어한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둠 자체보다는 그것이 주는 안온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날이 어두워져도 내가 쉽사리 집 안의 불을 켜지 않는 이유다.


세면대 위의 거울을 바라본다. 어둠에 반쯤 잠긴 얼굴의 흐릿한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려 애쓴다.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기쁨에 사로잡힌다. 약간은 어둡고 따뜻한 성질을 지닌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호의적이라고 여긴다.


아까보다 빛의 각도가 조금 더 기울었다. 연필로 세심하게 덧칠해 놓은 것처럼 방 안의 어둠도 한 겹 짙어져 있다. 젖은 수건을 널어놓고 방 가장자리에 놓인 탁자 위 스탠드를 켠다. 옅은 오렌지색 불빛이 실내를 부드럽게 감싼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비로소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보통 해가 지는 이 무렵이 내가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시간이다. 내일까지 넘겨야 할 원고를 작성하고 타이핑을 한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서 세부를 다듬는다. 그러는 동안, 창밖에는 하루의 빛이 완전히 스러져 간다. 눈앞의 스탠드 불빛만이 담담하게 나를 응시하며 다만 조금씩 일렁거릴 뿐이다. 이제 곧 완벽한 밤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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