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어느 겨울날, 나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내가 탄 버스의 차창 밖으로 잿빛 풍경이 스친다. 이제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들판에 누군가가 모닥불을 피워놓았다.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 위로 약간의 그을음과 함께 연기가 하늘 높이 퍼지고 있다. 차가운 흑백의 겨울 풍경 속에서 횃불처럼 일렁이는 모닥불은 저기 어딘가에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일러준다.
또 다른 어떤 날에는 무덤들이 한데 모여 있는 나지막한 언덕 옆을 지나게 된다. 온통 눈으로 뒤덮여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그 언덕은, 둥그렇게 부푼 형태와 옆에 놓인 비석들로 인해 무덤가임을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어느 무덤 앞에 붉디붉은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멀리 차 안에서도 그것은 확연히 눈에 띈다. 각기 다른 붉은빛으로 어우러진 한 무더기의 꽃묶음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나는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누군가가 방금 막 그곳을 다녀가기라도 한 것 같다. 매서운 눈발이 날리고 손발은 그대로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날, 지독한 영하의 추위를 뚫고 무덤 앞에 꽃다발을 두고 가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뜨거운 것일까. 나는 그 붉은 꽃다발에 손가락이라도 덴 것만 같다.
어느 산속에서 혼자 돌탑을 쌓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 지인과 함께 오른 적 있는 그 산에는 틈날 때마다 찾아와 여기저기에 돌탑을 만들어 놓고 가는 누군가가 있다고 했다. 돌탑이란 게 원래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돌멩이를 하나씩 올려놓고 가는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혼자서 돌탑을 쌓는 이의 마음도 이처럼 붉디붉었던 게 아닐까 싶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부러 깊은 산 속을 찾아 돌을 하나 쌓고 그 위에 또 쌓는,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어떤 마음. 뜨거워서 델 것 같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