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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Oct 23. 2020

교통수단 _ 유보에 관하여

[물감과 타이프]

나는 미루고, 또 미루고만 싶어진다. ⓒ서정연


바퀴가 달린 대부분의 교통수단을 사랑한다. 그것들을 타고 달리는 동안의 시간을 끔찍이도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결코 어딘가에 다다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만 얻게 되는 안온함 때문에.


교통수단이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계기판의 바늘이 급격히 기울어지며 가리키는 숫자라든지, 극한의 속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쾌감과는 거리가 멀다. 내 명의로 된 자동차를 여러 대 소유한다거나 희귀한 차량을 수집할 때의 만족감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 자동차든 기차든 간에 그것을 타고 있는 순간만큼은 나로 하여금 감정 변화를 거의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달리면서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좋으므로, 나는 교통수단을 그토록 매력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 길 위에서 달리는 동안은 많은 것들을 유예시킬 수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 몸은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좌표축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탄 차는 계속해서 예정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것이고, 나는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나머지 몸을 가볍게 떨기도 할 것이다.


나는 자꾸만 어딘가로의 도착을 유보하고 싶다. 내가 탄 차가 끝없이 달렸으면 좋겠다. 나는 도착을, 최종을, 그러니까 내 삶을 미루고 또 미루고 싶어진다. 달리는 동안 거듭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지금 이 순간의 달콤한 유예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맛보고 싶다. 일주일 밤낮을 꼬박 달려 드넓은 대륙을 횡단한다는 열차도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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