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연 Oct 16. 2020

나의 붉은 압생트

[물감과 타이프]

나의 압생트는 어디에 있는가. ⓒ서정연


압생트(absinthe).

특유의 초록 빛깔 때문에 '녹색 요정'이라는 깜찍한 애칭으로 더욱 유명한 술. 알코올 도수 70에 육박하는 이 독한 음료는 사람에 따라 환각을 불러일으키고 때로 신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말부터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고흐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고 전해진다. 중독성이 너무도 강해 나중에는 국가에서 직접 제조를 금지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압생트를 애타게 부르며 시들어갔을지 짐작이 된다.


오늘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붉은색이 도는 술 한 잔을 그린 다음, 뻔뻔하게도 '붉은 압생트'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그것을 한 모금 들이켜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는 상상을 한다. 입술에 닿는 순간부터 식도를 거쳐 위장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은 뜨거움을 상상한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한때 무엇인가에 중독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뭐가 됐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평생을 혼자 쓸쓸하게 살다 갔으나 위대한 작품을 남긴 몇몇 예술가들, 혹은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하나씩은 무엇인가에 중독돼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어떤 것을 습관처럼 반복하며 얻게 되는 약간의 위안, 곧 뒤따라오는 깊은 환멸.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도 썩 괜찮은 삶처럼 여겨졌다. 한 마디로, 나도 나 자신을 표상하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었다고 할까. 그것 없이는 손이 덜덜 떨리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혀 영혼이 휘청거리게 되는 그런 삶에 기꺼이 나를 바쳐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어떤 것에 중독되는 데에 (아직까지는) 실패했다. 술은 마실수록 머리만 아팠고, 담배는 가까이 하기엔 불쾌함만 안겨다주는, 타인들의 기호품일 뿐이었다. 커피를 마시면 종종 행복해지곤 했으나 안타깝게도 며칠간 카페인을 입에 대지 못하는 상황이 와도 그다지 괴롭지가 않았다. 물처럼 즐겨마시던 탄산음료 역시 탄산수로 대체하는 중간 과정을 거치고 나니 쉽게 끊을 수 있었다. 먹는 것 말고도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무엇이든 마찬가지였다. 긴 시간을 두고 되풀이해도 나중이 되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는 내가 진정 강철 같은 굳건한 심지의 소유자인지, 그저 무색무취의 재미없는 인간인 건지 헷갈리기에 이르렀다.


사실 나는 무엇인가에 중독되고 싶었다기보다, '그것' 혹은 '그것에 대한 사랑' 없이는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간절한 어떤 것을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든 간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유일한 것, 나를 뜨겁게 만들어줄 동력을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의미란 그런 데서 비로소 찾아지는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오늘 나는 이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의 붉은 압생트, 라고 나지막이 발음해 본다. 그러면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불이 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불꽃이 꺼지지 않고 내내 타오르기를. 내 몫의 뜨거움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기를.

이전 14화 Where I belong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