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승일 선수께 바치는 글
마음이 무겁다.
이 이야기를 글로써 풀어보려는 시도가,
아니, 어쩌면 쓴다는 행위 자체가
이토록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소설 ‘물의 유희’를 지필 하기 위해 루게릭병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워낙 희귀 질환이다 보니 공식 자료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루게릭병에 대해 깊이 배우지는 않는다.
하루에도 몇 천 장씩 쏟아지는 강의록 속에서 루게릭병이 차지하는 분량은 고작 몇 페이지 남짓이었다.
대부분의 루게릭병 환자들은 루게릭병 클리닉이 있는 한양대학교병원으로 몰리기 때문에,
관련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 정보에 접근할 방법도 요원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들,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국내외의 유튜브 영상과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외국 서적들까지 읽었고, 각종 블로그와 카페 글들도 모조리 찾아 읽었다.
루게릭병의 진단 과정과 위루술이나 산소호흡기 사용 등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참 많이 울었다.
그렇게 긴 기간 동안, 밤새도록 반복해서 울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박승일 선수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이 글에 인용된 모든 문장은 박승일 선수의 이야기를 담은 책 『눈으로 희망을 쓰다』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움직일수있는건
손가락몇마디와
얼굴근육뿐
전하루종일많은시간을생각만하고살아요
농구 선수였던 그에게 루게릭병은 인생의 절정기에 찾아왔다.
그 진단은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근위축성측삭경화증), 줄여서 ALS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육신의 감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운동신경만 선택적으로 사멸되어 가는 퇴행성 질환.
발병 원인도 명확하지 않고, 완치할 방법도 없는 불치병.
팔다리에 힘이 약해지거나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으로 시작해,
결국 온몸이 마비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자율신경이나 감각신경에는 이상이 없어,
온전한 정신으로 그 과정을 견뎌야 한다.
루게릭병을 투병한 유명인들로는 스티븐 호킹 박사, 야구선수 루 게릭,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 모리 교수, 그리고 농구선수 박승일 등이 있다.
루게릭병은 2014년 여름, 기부금 모금을 위한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2018년, 가수 션이 국내 최초의 루게릭 요양병원 설립을 위해 다시 한번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불을 붙였다.
이 이야기는 바로 박승일 선수의 꿈이었던,
국내 최초 루게릭 요양병원 승일희망요양병원에 대한 이야기다.
내몸은고무찰흙과도같아서
만져주는사람이어떤자세로만들어놓느냐에따라
만든자세가고통이될수도쉬는시간이될수도있다
모두가잠든시간이되면
맥박은빨라진다
한자세로오랜시간버텨내야하기에
그것도어둠속에서
나의 할머니 역시 루게릭병을 앓으셨다.
발음이 어눌해지고 글씨도 쓸 수 없게 되자,
의사소통을 위해 그나마 남아 있던 다리 근육으로 땅에 천천히 자음과 모음을 적으셨다.
입 주변의 근육에 힘이 없으니 침이 자꾸 새어 나왔고,
그래서 언제나 휴지를 덧댄 마스크를 쓰고 계셨다.
항상 오디오 성경을 틀어놓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계셨다.
팔 하나, 다리 하나를 못 써도 괴로운 게 인간인데.
어린 시절 그런 할머니를 지켜보며 나는 막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저주가 분명하다고.
당연히 할머니가 그런 저주를 받을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설령 무슨 잘못을 했다 해도 이런 질병이 어떻게 그 어떤 사람에게 마땅할 수 있을까.
그 뒤로 나에게 세상은
아무에게나 무작위로 저주를 던지곤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 되어있었다.
인터넷에서 루게릭병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거의 곧바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바로 ‘루게릭포비아’였다.
몸에 힘이 빠지거나 이상 증세가 있을 때, 혹시 이게 루게릭병이 아닐까 걱정하는 일종의 건강염려증이다.
정신건강 관련 카페나 커뮤니티에는 특히 그런 글이 많았다.
처음엔 실제로 루게릭병을 앓았던 할머니가 떠올라 화가 났다.
하지만 루게릭 환자들의 삶 속에 몇 달씩 몰입해 있던 중, 나 역시 루게릭병의 초기 증상 중 하나인 근육 떨림이 유독 심해지는 기현상을 겪었다.
물론 단순한 마그네슘 부족이거나 밤낮없이 울며 지낸 탓에 생긴 피로증상일 거라 생각하며 넘겼지만,
그 일을 겪은 뒤로는 루게릭포비아로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할머니를 보며 막연히 떠올렸던 고통 외에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루게릭 환자들의 불편함을 알게 되었다.
모기가 윙윙거리며 살을 물어도 팔을 휘저을 수 없고,
눈에 눈썹이 들어가도 눈을 비빌 수 없다.
배에 힘을 줄 수 없으니 변비가 심해지고,
눈꺼풀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는
각막이 말라 붙는다.
편히 잠들 수도,
배고픔과 성욕을 해소할 수도 없다.
(운동신경이 마비된다고 해서 성적 욕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특히 남성 환자들이 이 문제로 오랫동안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 모든 불편함과 진실한 이야기를 솔직히 나눠주신 분들께 나는 깊은 감사를 느낀다.)
하지만 ‘육신의 감옥’은 박승일 선수를 가두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넘어 사회를,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희귀 난치병 환자들을 향했다.
가족을피말려
같이죽음까지부러들이는
물귀신이라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루게릭병을 천천히 굳어버리는 촛불의 밀랍 비유한 구절에 대해,
박승일 선수는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루게릭병 환자는 주위를 밝게 비추는 촛불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삶까지 함께 끌어내리는 물귀신이라고.
한 사람이 루게릭병에 걸리는 순간, 그 집안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밤낮으로 몸을 뒤집어주고, 호흡기에 낀 가래를 몇 분마다 제거해 주기 위해선 24시간 간병이 필요하다.
고가의 연명장비는 기본이고, 일반 요양시설에서는 전문 인력이 부족해 루게릭병 환자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가족들이 간병인이자 의료 전문가가 되어, 모든 경제활동을 포기한 채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루게릭병을 촛불에 비유한 모리 교수가 속한 사회는 달랐다.
미국은 탄탄한 복지제도 덕분에 가족들의 경제생활이 무너지지 않는다.
하루에도 여러 번 전문 간병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고가의 장비들도 무상으로 대여할 수 있으며,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의 손길로 환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나는 복지 제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할머니가 아프셨을 때, 부양을 도맡았던 아빠가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복지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말했던 기억이
내가 아는 전부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해외 환자들의 이야기는
국내의 루게릭병 환자들의 이야기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달랐다.
그들은 버림받지 않았다.
소외되지도 않았다.
루게릭병이라는 질병의 괴로움은 같았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고립이 아닌 연대와 화합의 이야기였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움을 넘어
기분이 나빴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차이를 느꼈다.
모든 루게릭병 환자들을 다 조사해 본 것도 아닌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지에 대한 부담감은 있다.
하지만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그래서 나누고픈 단편적인 예시가 있다.
해외 루게릭병 관련 소설, 수필, 브이로그를 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한 과정이 있다.
바로 Voice Banking(보이스뱅킹)이다.
미국에서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는 순간,
의사로부터 곧바로 보이스뱅킹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저장해두라는 권고를 받는다고 한다.
병이 진행되어 더 이상 목소리를 낼 근육이 남지 않았을 때,
그 목소리 파일은 마지막 남은 손가락이나
혹은 그것마저 불가능할 경우 안구 근육으로 입력한 문장을
기계음이 아닌, 그 사람의 목소리로 재생하기 위해 쓰인다.
국내의 서적과 영상, 그리고 각종 글들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보이스뱅킹에 대한 국내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검색을 하면 관련 글을 희박하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가 투병하셨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한국의 환자들에게 보편화된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우리 사회는
러시안룰렛처럼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불시에 찾아온 이 질병을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짐으로조차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서양 국가들은
그들의 생존을 넘어
그들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불쾌했다.
화가 났다.
이문제해결방법은하나
지방가지단체의도움으론답을얻지못함은물론
정부도움도역부족
환자와정보와안전을공유할수있는곳
요양소
예산 집행의 효율성이라는 명목 아래
소외지대에 남겨질 수밖에 없는 희귀 난치병 환자들.
사회의 무관심과 공무원들의 딱딱한 대꾸,
그리고 끝도 없는 규제 속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기를 포기해야 하는 환자들의 현실을 보며
박승일 선수는 결심했다.
루게릭병 환자들이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민간 요양소를 만들겠다고.
그는 병원 건립 모금을 위해
보건복지부와 기업, 농구단, 방송국, 신문사 등에
지원 요청서를 직접 보냈다.
이 모든 것은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게 된 그가
안구마우스를 통해 해낸 일이었다.
때로는 차가운 거절을,
때로는 무자비한 악평과 냉소를 견이며
철자법 맞추기는커녕 띄어쓰기도 사치스러울 만큼 고된 과정을 통해
글쓰기를 이어갔다.
그는 끝내 ‘희망’이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병세가 악화되어 안구마우스조차 사용할 수 없게 된 뒤에야
그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승일희망요양병원은 그렇게,
무려 15년 만에 완공된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루게릭 요양병원이다.
박승일 선수는 병원 완공을 눈앞에 두고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났다.
사회는 나를 포기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목을 다쳐 목소리로 글을 녹음하고 있는 내가 기특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한없이 겸손해졌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내 안으로 매몰되어
감히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논하던
과거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살아있음’이라는 희망을
왜 그토록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던 걸까.
그리고 오래도록
무거운 마음으로
나는 되뇌었다.
이 사회가 그를 위해 해주었어야 할 일을,
도리어 그가 이 사회를 위해 시작했다.
이 사회가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그가 외롭게,
홀로.
외롭게,
굳건히,
홀로.
왜,
왜,
왜.
그 모든 질문 속에서
설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말로 내뱉지 못한 깊은 이야기들을
굳어버린 몸속에 품고 있을
루게릭병 환자들을 생각하며
설이의 꿈은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