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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

걸어보지 않은 길은 글이 될 수 없으니

by 바달



손을 쓰는 아이



나는 설이가 손을 쓰는 아이이길 바랐다.


소설 『물의 유희』가 피아노를 전공한 한 대학생의 루게릭병 투병 이야기로

틀을 잡아가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보려 한다.



나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의학을 전공하고 있다.

여러 차례의 손목 수술 때문에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일상생활도 버거운 두 손목으로 학교에 돌아갔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당황스러웠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시간표는 매일 1교시부터 7교시, 많게는 8교시까지 수업으로 꽉 차 있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간신히 매고 간 가방에서 패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열정을 다해 필기하는 소리가 귀 속에 먹먹하게 울려댔다.


나도 필기하는 거 참 좋아했는데.

차마 공부를 마냥 좋아했다고는 말 못 하겠으나

좋아하는 펜으로, 예쁜 글씨체로, 내가 만든 정리법으로

나만의 세상을 만들 듯 열심히 필기하는 시간을

나도 참 좋아했는데.


막막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난 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엎어져 펑펑 울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내심 반가운 눈물이었니.

나는 원래 한 번 펑펑 울고 나면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다.



손글씨는커녕 타자를 치는 것도 어려웠다.

하루 종일 강의록 페이지를 넘기는 일조차 버거운 손목 상태였다.


포기할 것은 깔끔히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따뜻한 조언을 건네주는 고마운 친구들이 있었다.

“이것만 해도 유급은 안 해.”

“난 이렇게 공부했어.”

“진급만 하자.”


내 손목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료만 공부하고, 나머지는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또, 손으로 쓸 수 없으니 눈으로 읽으면서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여러 번 반복하는 방법뿐이었다.


아무리 눈으로 읽어도 외워지지 않는 것 역시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물론 시험 직전이 되면 담담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결국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은 손목을 갈아 넣으며 외웠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시험기간이었다.)


정말 버텼다고밖에 말 못 하겠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이제는 오히려 글씨 쓰면서 공부하라 하면 집중을 못 한다.

손목 사용을 최소화하며 공부하는 데 최적화되어 버렸다.


막막함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다.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코딩을 하는 컴공을 전공했다면,

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미술을 전공했다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하지만 나는 “내 일은 아니니까” 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다.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한마디가 있었다.


이전에 수술을 받기 위해 손목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를 봤던 날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딱딱하게 변성된 힘줄에 갈려 표면이 울퉁불퉁해진 내 뼈 사진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얼마 전에 피아노 연주자가 진료 보러 왔는데, 그분은 아예 뼈가 하얗게 멍들었더라.”


피아노 연주자가 손을 못 쓰게 되는 일은,

내가 취미로 피아노를 두드리던 것과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일을 포기하며 느꼈던

어쭙잖은 속상함과

감히 비교할 수 있는 일일까.


사람은 다 살 길이 있기 마련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던 게

그 한마디를 떠올릴 때마다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 슬픔이 존재한다니.

연주자가 손을 못 쓰게 되는 일,

예술가가 자신의 세상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이 세상에 정말 존재한다니.


만나본 적도 없는,

손목뼈가 너무 닳아 하얗게 멍들었다는 그 연주자 때문에

나는 이따금씩 또 펑펑 울고 싶었다.


하지만 공부 때문에 막막했을 때처럼

마음 놓고 울어보진 못했다.


내 눈가에 맺히는 것이 눈물이 아니라

위선일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꽤 오래 묻어두었던 것 같다.



존재하는 슬픔



시간이 흘러

결국 묻어두었던 모든 두려움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

루게릭병을 소설로써 마주하기로 결심했을 때 —

나는 이 또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영혼이 뜯겨나가는 듯한 상실은,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글쓰기의 팔 할은 자료조사인 것을



새하얀 워드 파일과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아주 간단한 진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해 쓸 수가 없다.

나는 음대생의 삶에 대해서도,

더 나아가 음악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내가 자처한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정유정 작가가 『영원한 천국』의 배경을 떠올리기 위해

사막까지 갔다는 다소 오버스러운 이야기를 그제야 이해했다.


마음 같아선 의대 건물 근처에 있는

음대 건물로 당장 쳐들어가고 싶었다.


작곡을 전공한 엄마에게 인터뷰를 시도하면서 또다시 깨달았다.

아는 게 없으면, 제대로 된 질문도 할 수가 없다.

일단 자료 조사가 급선무였다.


음악인들이 모여 있는 카페에 가입하고,

음악 전공자들이 운영하는 블로그 글을 죄다 찾아 읽었다.

피아노 연주자 인터뷰 영상을 샅샅이 찾아보았고,

음악사 교과서까지 정독했다.


그 짓 할 바엔 차라리 주인공을 의대 다니는 애로 하지 그러냐고

엄마가 한마디 할 정도였다.

물론 나는 흔들림 없이 삽질을 이어갔다.


음대에는 예약제로 운영되는 연습실이 있고,

‘위클리’라고 부르는 연주 수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기마다 연습해야 하는 과제곡의 난이도가 다르고,

또 필기시험 외에도 실기시험이 있으며,

그 학년에 맞는 수준의 곡을 준비해 가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소나타, 에튀드, 협주곡

바로크파, 고전파, 낭만파

포르타멘토, 레가토, 스타카토


삽질도 이런 삽질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보지 않은 인생길의 이야기에

매료되기도 했다.


나의 한 학기가 해부학이나 병리학, 소화기학이나 산부인과학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그들의 한 학기는 리스트와 베토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와 쇼팽으로 기억된다는 것.


내가 시험기간에 몸살이 난 채로 밤을 새우고

토할 것처럼 가득 찬 머리에 약물 이름 하나를 더 밀어 넣듯이,


그들은 실기시험과 연주 수업을 앞두고 손이 꼬여 괴로워하고

레슨실에서 교수님께 듣는 핀잔을 온몸으로 견디며

음악을 향한 애정을 지켜낸다는 것


피아노 앞에 앉아

매일같이 외롭고 답답하지만,


입시와 진로 고민에 찌들고

틀에 갇혀버린 예술에 염증을 느끼곤 하지만,


또 때로는 찬란하고 숭고한 것에 손이 닿을 듯이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참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근긴장이상증으로 말을 듣지 않는 두 손을 다독이며 졸업까지 버텨낸 음대생의 이야기와,

유학 도중 뇌졸중으로 몸의 오른쪽 절반이 마비되었지만

한 손으로 연주를 이어갔던 연주자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친분이 있는 언니의 연주회를 보러 갔다가, 그 언니 역시 근육질환을 이겨내며 음악을 지켜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이 어떤 결말로 흘러가든,

나와는 먼 세계의 이야기에 발을 들여

그 삶을 알아가 보기로 한 결심 자체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음대생 설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젠 루게릭병에 대해 조사할 차례였으니,


그리고 그건

발을 들이는 순간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깊은 호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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