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좋은 글을 만드는가
낯선 충격
모든 소설이 따뜻한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병원 입원기간 동안 『파친코』 다음으로 들었던 오디오북은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이었다.
영화를 볼 때도 사전조사 없이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윌라 오디오북 순위에 있던 소설 중 구미가 당기는 것으로 골랐다.
그런데 아뿔싸, 소독과 재활로 신음소리가 절로 나오는 입원 기간 동안 듣기에 아주 적절한 책은 아니었다.
시작부터 음침하고 스산했다. 아픈 와중에 뭐 그런 걸 듣냐며 간병해 주던 엄마가 한 마디씩 할 정도였다.
설마 끝까지 이렇겠나 싶어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마지막으로 갈수록 더할 나위 없이 가혹하고 잔인했다.
『파친코』와는 또 다른 의미로 휘몰아치듯 끝난 소설이었다.
잔잔한 감상 대신 혼란과 벅참이 동시에 남아 있었다.
혼란과 벅참. 나는 두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 좋은 글을 만드는가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위한 글이었을까.
한동안은 순수하게 작가의 필력을 선보인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다.
빨려 들어가는 문장과 표현,
눈앞에 그려지는 공간과 피부에 닿는 소름.
이건 분명 기교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벅차고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정말 기교만으로 싸워도 되는 걸까.
실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교는 단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갈고닦아도 타고난 무언가가 없다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너무 섣불리 글을 쓸 수 있다고 자신했던 건 아닐까.
나와 추구하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애써 멀리하려 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혼란과는 별개로, 해결되지 않는 찝찝함이 있었다.
기교만으로 충분한 책이었다고 결론지으려 했지만,
그러기엔 나에게 ‘의미’라는 것이 너무 필수적인 가치였다.
결국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그녀를 이해해 보고 말리라는 아집으로.
날것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운명의 변덕에 휘둘린 불운한 인간, 최선을 다하고도 파멸로 치달아버리는 어리석은 인간, 욕망에 눈멀어 자신을 내던지는 무모한 인간,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것을 기어코 지켜내는 인간, 추하고 졸렬한 민낯을 드러낸 야만적인 인간, 죽음 앞에서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남루한 인간…’
그녀의 이야기를 읽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깊은 아픔, 그리고 그것을 덮어둔 채 넘어갈 수 없었던 그녀의 독기.
그 앞에서 나는 겸손해졌고 동시에 기뻤다.
그래, 이게 다일 리가 없어. 분명 뭔가 있을 거야.
그 의문이 그녀의 이야기와 닿을 만큼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생명의 필멸성과, 언젠가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불확실성과, 그것이 닥쳐오기 전에 내 삶과 치열하게 맞붙어야 한다는 현실과제를. 또한 존재가 사라져도 세상이 변함없이 돌아가고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 존재의 죽음이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 존재는 단지 한 번 사는 것뿐이라는 서글픈 진실을 실감했다.’
불운한 인간. 파멸하는 인간. 무모하고 야만적이며 남루한 인간.
그녀는 인간의 운명과 독대하고 있었다.
조금의 타협이나 무마도 없이, 날것 그대로.
‘소설도 마찬가지다. 한 편을 쓰는 데 2~3년이 걸리는 장편은 더욱 그렇다. 광기에 가까운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없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동안,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두려움과 막막함, 글이 막히는 고통과 자기 환멸을 견디기 힘들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에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글을 잘 쓰는 것은, 그녀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였다.
더 이상 그녀와 내가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동경했다는 스티븐 킹의 글을 찾아 읽었다.
독자분들은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나는 공포물에 특별한 취미가 없다.
스티븐 킹의 소설도 읽어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읽을 용기가 생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궁금했다.
어떤 욕망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공포물을 만들어내게 하는가.
‘나는 다만 어쩌다가 발이나 무덤 따위를 좋아하게 되었을 뿐이다. 여러분이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로서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이 고작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이야기가 좋다.’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그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썼을 뿐이라고.
모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써야 한다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쓰려하는 건 결국 가짜일 뿐이라고.
좋아해, 지독하게
애정 어린 시선과 따뜻한 사랑이 작품의 의미를 만든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주인공으로 꺼내 놓기로 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었다.
그 아이가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 아무리 노력해도 내게는 저주와 고통, 그리고 가장 비참한 이미지로 남아 있던 루게릭병이었다.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덮어놓고 ‘괜찮아’ 할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이 못 된다.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런 나에게 일종의 오기,
아니, 어쩌면 당위감이 생겼다.
덮어놓고 타협해선 안 된다고.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아이와
그에게 닥친 운명을
섣불리 보듬으려 들진 않았다.
대신 긴 호흡으로 여정을 준비하며
결심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끝내 설이를 사랑하겠노라고.
글쓰기는 오픈북
필력에 대해서도, 그저 의미만 있으면 된다는 핑계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작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퇴원 후에도 한쪽 손은 거의 쓸 수 없었고, 반대쪽 손도 시원찮았다.
그래서 한 달 정도는 오디오북만 열심히 들었다.
감사히도 오디오북 중에 작법에 관한 책이 몇 권 있었다.
책 한 권씩 들을 때마다 배우는 것이 많았다.
가장 많이 들은 건
간결하고 깔끔한 문장을 쓰라는 이야기였다.
요즘에도 문장을 깔끔하게 쓰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다.
글을 녹음해서 복사·붙여넣기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때부터
사전을 많이 뒤졌다.
나는 어휘력이 부족한 편이다.
학창 시절엔 국어시험에서 아무도 틀리지 않는 어휘 문제를 틀려서 골치가 아팠다.
(참고로 아직도 악몽을 꾸면 국어시험을 본다. 국어만큼 힘든 게 없었다. 한참 책을 많이 읽을 시기에 오디오북과 이북리더기가 영어책만 지원된 탓이다. 이렇게 시절 탓을 한번 해본다.)
하지만 오히려 잘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외국어라 생각하고 열심히 단어를 찾아봤다.
웬걸, 글쓰기는 시험과 달리 오픈북이다.
별건 아니지만, 애용했던 사전을 공유해 본다.
손을 못 쓰는 상황이니 음성인식 기능이 특히 유용했다.
유의어를 찾아보기도 좋았고,
특정 표현이 문장에서 어떻게 쓰여야 문법적으로 자연스러운지 확인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끝으로, 스티븐 킹의 말을 인용한다.
내게 큰 도움이자 위로가 되었다.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으로, 쉬운 낱말을 쓰면 어쩐지 좀 창피해서 굳이 어려운 낱말을 찾는 것이다. (...) 제일 먼저 떠오른 낱말이 생생하고 상황에 적합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낱말을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