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향한 따뜻한 시선
무엇이 작품이 되는가
수술을 마치고 나온 첫날은 정신없이 아팠다.
둘째 날부터 정신이 돌아와 오디오북 『파친코』를 듣기 시작했다.
고른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한 손은 깁스, 한 손은 링거를 꽂고 있으니 책을 읽으려면 오디오북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때 윌라 오디오북 소설 부문 순위권에 있던 책이 『파친코』였다.
두 권짜리라 일주일의 입원기간을 함께하기에 넉넉한 분량이겠다 싶어 골랐던 것 같다.
(참고로 이건 큰 오산이었다.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고, 사흘 만에 두 권을 다 들어버렸다.)
『파친코』는 일본에 이주한 조선인 가족의 삶을 그린 이야기다.
주인공 ‘선자’가 어린 소녀에서 시작해 나이 든 할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재일 조선인들이 겪었던 차별과 빈곤,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 단순히 입원기간 동안 집중할 거리가 필요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찾아야 했다.
무엇이 작품이 되는지,
어떤 것이 의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남는지,
어떤 소설을 써야 하는지.
『파친코』는 세계적인 명작이다.
무엇이 이 책을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한 걸까.
처음에는 소재의 독특함에 대해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곧 이어진 한국전쟁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주로 조선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한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던 재일 조선인들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그들이 겪은 차별과 혼란은 매우 참신한 소재이다.
참신한 소재와 흥미로운 글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명작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소재의 독특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편적인 주제일수록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다는 장점과,
동시에 이미 많이 소모되었다는 단점이 있다.
반대로 흔치 않은 주제일수록 참신함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공감을 얻기 어려운 단점도 함께 가지고 있다.
단점을 감수하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작가의 몫일뿐, 그것이 작품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절대적 요인이 될 수는 없다.
작가의 필력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름다운 문장이 아름다운 소설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물론 원작이 영어로 쓰인 소설을 한글로 번역한 오디오북을 들었으니, 작가의 필력을 온전히 논하기에 적합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파친코』의 이민진 작가는 애초에 전문 작가가 아니라 법조인이었다.
변호사로 일하던 중 건강 문제로 법조계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전향했다.
도서관을 사랑하고 책을 탐닉하며 작가로서의 자질을 길렀을 뿐, 문학이나 언어를 전공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필력을 무기 삼아 작가 활동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설의 장대한 스케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파친코』는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4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려낸 이야기다.
그 당시 사회에 대한 방대한 정보, 거대한 역사의 흐름, 그리고 개개인의 이야기가 얽혀 나아가는 대서사는 실로 충격적이다.
글을 집필하는 데만 10년 가까이 걸렸고,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재일 조선인의 삶을 조사한 기간은 그 몇 배가 되었다는 사실이 납득이 된다.
그러나 빨려들 듯 사흘 만에 이 책을 다 읽어버린 것이, 과연 거대한 스케일 때문이었을까.
물론 이야기가 웅장해질수록 그 안으로 휘몰아져 들어가기 쉬워지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작가에게 양날의 검일 수 있다.
이야기를 크게 벌려 놓을수록 후반부에 길을 잃고 헤매기 쉽다.
방대한 이야기가 서로 복잡하게 뒤얽힐수록 주제의식을 맷집 있게 끌고 가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많은 시리즈물이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선자’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이야기가
다시 ‘선자’에게 다소곳이 다가가며 마무리되는 순간,
나는 이 소설의 본질을 붙들고 있던 것이 무대의 거대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이 소설의 힘은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 있었다.
너를 향한 따뜻한 시선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는 영웅도, 위인도 아니다.
역사의 한 장면을 살아내야 했던 여인.
후회와 기대.
성공과 실수.
넘어지고 일어서며,
버티고 견뎌내는,
어찌 보면 한없이 평범한 이야기.
그 이야기에 그토록 힘 있게 빨려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긴 서사 위에서 흔들리지 않던 한결같은 무게.
바로 선자를 향한 작가의 따뜻한 사랑이었다.
이민진 작가는 미국으로 이주해 살면서 어린 시절부터 정체성, 소속감, 차별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대학 시절 우연히 들은 재일 조선인 역사 강의는 그녀의 아픔과 공명했을 것이다.
재일 조선인의 삶이 자신의 이민 경험과 겹쳐지며, 이를 한 여인의 이야기로 풀어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그녀 안에 피어났을 것이다.
영원한 이방인, 소외된 민족.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간 그들의 삶이 얼마나 억척같고 치열했는지
그녀는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역사가 철저히 소외시킨 사람들.
그럼에도 살아낸 인생.
그 삶의 힘과 존엄성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품을 수밖에 없었을 따뜻한 시선,
그것이 『파친코』라는 소설을 끌고 간 원동력이었다.
여기부터는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미룰 수 없어서 글의 말미에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게 된 외할아버지를 뵙고 왔습니다.
말년에 인생 조졌다며 웅얼웅얼 신세한탄을 하시는 모습마저
제 눈에는 여전히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붙잡고 운전에 집중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차 안에서 한 줄기의 의문이 저를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삶을 사랑해도 되는 걸까요.
책상 앞에 고상하게 앉아
삶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
그렇게 집에 돌아와 조금 쉬고 싶어 핸드폰을 집어 들자마자 접한 것은
부고 소식이었습니다.
https://youtube.com/@blossom_joo?si=D9V3JuDEovU7FCU5
루게릭병 투병 과정을 유튜브를 통해 나누어 주셨던 ‘필승쥬’님이 떠나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통 영상이 올라오지 않아 마음 한편이 무겁던 중이었습니다.
루게릭병이 워낙 희귀병이다 보니 『물의 유희』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습니다.
블로그와 카페에서 글을 모조리 찾아 읽었고,
한국에서 세 분, 외국에서 두 분의 유튜버를 발견해 그 영상들도 꼼꼼히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유투버 ‘필승쥬’님도
속으로 많이, 정말 많이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부고 소식을 접하고 잠시 멍해 있었습니다.
제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왔던 질문이 서서히 증발해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삶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요.
그 대신 저는
‘필승쥬’님이,
그리고 투병 과정을 끝내고 떠난 모든 이들이
견뎌야 했던 시간과
마땅히 누렸어야 했을 시간을 생각했습니다.
.
저는 가끔 어린아이 같은 상상을 합니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면
그곳에서 저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만나서 인사하고 싶은 작가들이 많습니다.
저는 또 상상했습니다.
먼 미래에 그곳에서 필승쥬님도 뵐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고맙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고마운 건지 정리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견뎌 주어 고맙다고,
혹은 그 모든 과정을 담담히 나누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아니요, 그냥
고맙다고
꼭 전하고 싶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