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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있나요 #1

무엇이 작품이 되는가

by 바달


하나의 소설이 되려면


손목 재수술을 위한 병원 입원을 앞둔 몇 주간, 나는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단어들을 녹음기에 열심히 주워 담았다.

짊어지고 있던 질문과, 억눌러온 감정, 그리고 이제 막 펼쳐지기 시작한 한 소녀의 이야기.


장면은 장면대로 감정은 감정대로 분류했다.

뒤죽박죽 엉켜 있던 실타래를 한 올씩 풀어내려 애썼던 것 같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어질러진 방을 정리할 때처럼 마음이 잠잠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미 세 번이나 견딘 수술이었다.

하지만 그 경험이 도움이 되지는 않고 있었다.


어떤 경험은 사람을 잠잠하게 하지만

어떤 경험은 도리어 마음을 소란하게 만든다.

지금까지의 세 번의 손목 수술과 한 번의 발목 수술은 모두 후자에 속했다.


어떻게 견딜까.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통증을, 재활을, 혼자 씻지도 입지도 못해 주눅 드는 몇 달간의 시간을.


머릿속이 복잡할 때 돌연 방 정리를 시작해 본 이들은 이해할지 모른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우리의 마음 또한 정돈되게 하는지를.


다가올 미래가 아닌

지금 내 앞에 꺼내어 놓은 감정과 장면을 분류하는 데 몰두하면서, 덕분에 그 몇 주간 나는 꽤 잠잠했다.


하지만 잔잔했던 건 마음의 표층이었다.



새로운 두려움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살벌하게 요동치는 것을 제쳐두고 방 정리를 시작했을 때,


낡은 서랍과 옷장을 마구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꺼내고

대책 없이 침대 위에 쌓아 두었을 때.


꺼내놓은 짐의 부피에 압도되어 내 속에서 요동치던 것을 잠시나마 잊었을 때.


비워낸 서랍 속 오래된 먼지를 닦고

큼직한 물건부터 다시금 켜켜이 채워 넣을 때,


분주히 움직이는 나의 손과

낡은 먼지를 들이마시는 나의 호흡을 느낄 때.


잊었을 때. 나에게 닥쳐온 삶의 무게를 정말 다 잊었을 때.


그 잠잠함 속에서 도리어 침착하게, 묵직하게 침몰하는 나의 정신.



무의식이었을까.


날카롭게 냉철해지며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그것은.

깊은 물속으로 겁 없이 침몰하던 나의 일부는.


물론 문장으로 꺼내어 낸 모든 감정과 장면이 그 자체로 반가웠고, 또 소중하기까지 해서

그저 하나의 글로 남기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향해 헤엄치고 있는가?


이 이야기의 파도 속에서 무엇을 손에 쥐고자 하는가?


아니, 냉철해진 나의 무의식은 이 두루뭉술한 질문을 예리하게 다듬어 놓았다.


무엇이 작품으로 남는가.


그렇다. 몰두할 것이 생겨 잠잠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생겨 들떠 있으면서도

나의 깊은 무의식은 새로운 두려움과 마주하고 있었다.


녹음기로 열심히 쏟아놓은 문장들이

한평생 깨알 같은 글씨로 쌓아둔 일기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면,


그건 작품이 아닌 감정 배설구가 되고 말 텐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무엇이 작품이 되는가


몸을 저주하는 중에 느끼고 말았던 삶의 의지와

떡진 머리를 모자로 덮은 채 휠체어를 타고 나와 보았던 파란 하늘은


너무 예뻤다.


나는 그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대로 오디오북과 이북리더기를 총동원해 가며, 손을 못 써도 소설을 읽을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내가 찾고자 했던 건 한 가지였다.


무엇이 글을 작품으로 만드는가.


무엇이 구차한 하소연이 아닌

유의미한 아름다움으로 남는가.


무엇이 끝내 예술이 되는가.



소설을 통해 다양한 작가들을 만났다.

따뜻한 사람, 수더분한 사람, 예민한 사람, 냉소적인 사람.

모두 서로 다른 세계관과 질문을 품고, 각기 다른 문체와 필력으로 그것을 풀어낸 작가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그들에게서 같은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무언가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지독한 사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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