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동아줄
필라테스 원장 제의가 왔는데, 너 할래?
오전수업을 하고 중간에 해피아워라고 불리는 한가한 시간.
개인적인 볼일을 보고 다시 출근하려고 하는 데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시간이 되면 지금 당장 미팅이 가능한지 묻길래 마침 근처라 바로 만남이 성사되었다
강사생활에 적응하며 잘 지냈지만 언제까지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던 찰나에 온 기회라 일단 잡고 보자는 마음이 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한 센터의 원장이 된다고?
원장이라는 자리에 걸맞지 않게 너무 가벼운 제의라 오히려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기분 탓일 거라며 미팅에 참여했다
담배쩐내, 눈에 띄게 박혀있는 명품 로고들
대표의 첫인상이었다
첫 만남에 느낀 점은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않고 본인에게 취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히 사람을 짧은 시간 안에 판단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라는 것은 저절로 받는 기운이기에 싸함 그 자체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예의를 갖추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당장 이 일을 할 건지 말건지를 결정하라고 하기에 당황스러웠다
뭘 믿고 이 자리를 맡기려고 하는 건가요?'
물었더니 그는 '타이틀이 필요하다'라고 답하였다
나름 학력에 자부심이 있었으나 일상에서 크게 생각지 않던 부분이 이럴 땐 또 요긴하게 쓰이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대표는 나에게 상담, 매출관리를 언급하며 센터에서 수업 외적인 업무를 해보았는지 물었다
센터에 담당자가 비었을 때 결제와 상담을 해본 적은 있으나 거의 수업 위주로 일했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정확한 실무경험이 없다 보니 어필하기 힘들었다
미팅은 30분도 안되어서 끝났고 이력서를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이력서에는 내가 기존에 쓰던 강사 이력서와 함께 새로운 업무를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서 추가로 적어 보냈다
결정은 대표에게 맡기고 나는 연락을 기다렸다
이후의 한 번의 미팅을 더하여 새로 오픈할 위치 좋은 곳에 원장이 되었다
내가 입성하고 싶었던 지역에 좋은 입지라 수입도 현재보다 늘리면서 경력까지 쌓을 생각 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대표가 최대한 빠르게 일을 정리하라고 하였으나 보통 퇴사통보는 최소 한 달 전에 해야 하고 계약서를 아직 쓰지 않았으니 우선 계약서를 쓰고 진행하자고 말했건만 알겠다고 하며 차일피일 미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니다 싶은 시점이 여러 번 있었기에 내 선택으로 충분히 멈출 수 있었으나 애써 불안한 기운을 누르며 내 욕심으로 일을 진행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등 떠밀리듯 새로 시작할 일에 지장이 없도록 그동안 일했던 센터에 퇴사예정임을 밝혔다
이후 새로 오픈할 센터를 매일 방문하여 인테리어 점검, 소도구, 필라테스 기구 견적, 센터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주변 센터 시세 체크까지 필요한 부분을 보고서로 대표에게 틈틈이 전송했다
일을 진행하면서 대표와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보통 일을 했을 때 피드백이 와야 하는데 기껏 시킨 일을 하고 나면 이미 대표는 혼자 결정이 끝나있었던 상황이라
나에게 공유를 하지 않으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었던 적이 많았다
소통 과정에서 미안하다 수고했다 고맙다는 예의가 섞인 말도 일절 없었다
미팅을 하면 할수록 필라테스 업계의 강사들 무시와 폄하발언, 인건비를 시장 시세보다 낮추려고 하는 모습
타인을 욕하면서 본인의 입지를 다지는 모습에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
정작 체육분야 학력도 없는 분께서 필라테스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이 무시를 하니 어이가 없었다
나에게 열심히 가스라이팅을 하여 본인 입맛대로 운영하고 싶었겠지만 한 고집하는 나 때문인지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위태위태했던 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센터 콘셉트에 대해 대표와 의견이 갈리는 상황에서 나와
'결이 맞지 않는다'며 날 연결해 준 지인에게 통보한 후 잠수를 타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대표와 연락이 되지 않던 보름의 기간 동안 나는 심리적으로 우울과 불안증세가 심해졌다
열심히 잘해보고자 했던 내 목표와 열정이 솟구쳤던 와중에 갈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내가 원장이 될 예정이고 어떤 식으로 센터가 오픈 준비 중인지 설레는 마음으로 말했건만...
갑자기 백수가 된 나는 어떤 식으로 일을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왜 나는 무작정 당하기만 해야 했을까 하는 원망과 분노가 마음속에 일었다
이후에 뒤늦게 연락이 닿은 대표는 직접 만나서 얘기하려고 연락을 안 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와 함께 영혼 없는 사과를 했다
대표의 사과를 받아낸 이후 하나씩 다시 원래대로 나를 제자리에 되돌아 놓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은 힘들었지만 회원님들께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존에 퇴사통보 했던 센터에서 감사하게도 계속 일해주면 너무 고맙다고 말해준 덕분에 힘내서 다시 일할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프지만 배운 점도 많고 그만큼 성장했다
내가 아직 원장의 깜냥이 안되었기에 하늘이 움직였구나 생각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계약서를 쓰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
싸한 사람을 가까이 두지 말 것.
그 센터는 오픈 전부터 현재까지 원장이 4번 바뀌었다고 한다
수익이 잘 안나는 건지 운영이 어려운 건지 현재 인수자를 찾는다고 한다
꼭 내가 예견했던 것처럼 흘러가니 어쩌면 인생은 공평한 걸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