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림 심한 강사의 초과근무
연말이 다가오니 슬슬 회식 이야기가 나온다
단체 카톡방에는 각자 언제 시간이 가능한지 투표함이 열렸다
비교적 일반 회사들에 비해서 민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근무했던 곳들의 회식날짜는 통보식이었기 때문이다
소속 강사들 중에 대다수가 본인이 계약한 시간에만 수업하고 퇴근하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강제성은 없다
하지만 모임에 가끔이라도 참석을 해야 센터에서의 입지라는 것이 유지가 된다
나는 자발적 눈치게임을 시전 하며 가장 투표수가 적은 곳에 표를 던진다
매번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나만의 투표 방법을 누군가가 알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
참여가 내키지 않는 이 마음을 온전히 숨기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비싼 밥 공짜로 먹어서 좋은 거 아니야?
남편이 말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관점이라 우리는 참 성향이 다르구나 다시 한번 느낀다
외향인인 남편은 사람을 만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고 항상 낙천적이며 당당하다
마치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꼬리를 흔들며 달려올 것만 같은 강아지 같은 사람이다
반면에 나는 예민하고 나만의 사적인 공간에 있는 것이 편하다
갑자기 선을 넘으며 다가오면 숨어버리거나 냥냥펀치를 날리는 고양이 같은 사람이다
불특정 다수와 근사한 식사보다는 컵라면을 먹더라도 집에 혼자 있는 게 더 좋은 편이다
낯가림도 심하고 불편한 상황에서는 뭘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체 타고난 기질이 그러하다 보니 다수를 리드하여 하루종일 수업하는 내가 적성을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이따금씩 든다
어쩌다가 이렇게 하루종일 타인과 말 섞는 일을 하게 된 걸까
결론은 하나다
춤쟁이가 돈 벌려고 뛰어든 거지. 다 돈 때문이다
돈 벌 땐 내향이고 외향이고 없다
일할 땐 그 공간에 맞춰 매시간 몰입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보다 모임 참여 횟수가 더 저조한 강사님이 있다
다년간 같은 센터에서 근무시간이 겹쳐 자주 마주치던 강사님이다
그분은 성향이 나랑 비슷하여 대단한 노력 없이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던 분이었다
수업과 수업 사이 그 짧은 시간의 스몰톡도 시간이 누적되니 어느덧 알게 모르게 서로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습득하게 되는데, 필라테스 센터는 최소한의 생계 비용을 벌기 위한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다양한 취미를 섭렵하여 본인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이었다
실제로 필라테스가 아닌 다른 적성을 찾아 공부 중이라고 했다
어떤 분야인지 매우 궁금했으나 깊게 물어보지 않고 응원해 줬다
현재는 내가 같은 센터의 다른 건물로 이동하게 되어 볼 일이 거의 없다
연말 회식마저 불참하여 이제 일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들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
그렇다고 사적으로 연락하기에는 상대방의 의사를 모르기 때문에 인연유지는 당분간 여기까지인 것이다
"일 년에 딱 한 번만 회식에 참여하자"
이 것은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기 위한 나만의 암묵적인 룰이다
그 이상은 도저히 내키지가 않아 시간이 아깝다
3인 이상의 모임은 대부분 시시콜콜한 대화들이 오가는 자리라 대화의 질이 불만족스럽다
영양가 없는 대화와 영혼 없는 리액션으로 내 체력과 정신만 피폐해질 뿐이다
물론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관계유지에 도움이 되지만 딱 그것뿐이다
만약 인맥으로 주변사람에게 도움을 얻는 순간이 생긴다면 그것은 내가 유독 친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코로나를 핑계로 회식을 포함한 모임들을 요리조리 피하게 되어서 좋았는데, 회식의 끝판왕인 연말 회식을 빠진다면 오히려 불참한 사람이 티가 많이 나기 때문에 1차만 하고 조용히 나갈 계획까지 미리 세워놓았다
애석하게도 어느 하나 붙잡는 이가 없을 텐데 혼자서 참 요란법석하게 말이다
회식 당일의 날씨는 쌀쌀한 내 마음이 반영된 것 마냥 추운 날씨였다
코트를 입지 않은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한겨울엔 역시 롱패딩만 한 게 없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 핑곗거리가 생긴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상상만 할 뿐, 성실한 근로자로는 오늘도 마치 출근날인 것 마냥 약속시간을 지켜야만 했다
지도 어플을 켜고 한참 찾아 들어간 곳은 원테이블 레스토랑이었다
한 팀만 오롯이 공간 전체를 쓰는 아늑한 곳이었다
원장님께서 여자들 모임이라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느껴졌다
두 시간만 있다가 갈 생각이었기에 딱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쓱 문을 열었더니 원장님과 강사님 두 분이 계셨고 그동안 마스크 낀 채로 한 두 번 마주친 게 전부인 선생님들의 하관까지 마주하려니 처음엔 낯설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술이라도 많이 마셨으면 미친척하고 적극적으로 대화라도 시도할 텐데 모든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애써 마음에도 없는 말 했다가 분위기를 망치기보다는 오가는 말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편안한 무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여느 식당이었으면 다른 테이블 사람들과 말이 겹쳐 데시벨이 올라가기 마련인데 이곳은 원테이블 레스토랑의 장점을 한껏 살린 낮은 채도의 조명에 잔잔하게 얹어진 보사노바 캐럴의 아늑한 무드로 테이블은 점점 따스하고 몽글몽글해졌다
하나 둘 모여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반가운 강사님들도 보게 되고 맛있는 식사도 끊임없이 나오니 자연스레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다 같이 모여 둘 또는 셋, 근처에 있는 사람들끼리 대화를 하며 음식도 서로 덜어주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다 보니 다들 저마다의 인생을 보내고 있구나 다시 한번 느껴진다
일을 하다 보면 이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느껴지는 대로 해석해버리기도 하고 이해관계에 의해 판단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각자 본일 살길 알아서 잘 만들어가고 있고 다양한 생각으로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구나 느끼면서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 갑자기 원장님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시켰다
보아하니 이번 모임에서 초면이신 분이 몇 분 계셨다
자기소개로 한바탕 폭탄 돌리기가 끝난 줄 알았더니 이제는 내년 계획을 한 명씩 말하자고 하면서 원장님부터 다시 한 바퀴 돌아가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만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느낌이라 무엇을 말해야 하지 고민하다가 그럴듯하게 취미생활을 도전하겠노라 언제 실행할지 모르는 발언을 하며 재빨리 다음 사람에게 폭탄을 넘겼다
자세한 내용은 말 못 하지만 다들 본인만의 거창한 계획이 있었다
일로 만난 사이라 그런지 대화주제는 주로 '일'에 관련된 것이 제일 많았다
두 번째로 많았던 주제는 '남자'였다
저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의 재력, 능력과 본인에게 얼마나 잘 대해주는지에 대하여 자랑을 하는 데 흥미로웠다
만약 나라면 주목받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 말 못 했을 것 같다
역시 청춘들답게 당당함이 무기인 걸까
다수가 있는 곳에서 얼마나 명품선물을 많이 받는지, 남자친구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용기가 대단하고 신기했다
원래 남 연애 이야기가 제일 재밌지 않은 가ㅎㅎ
이런 대화에 호들갑스럽게 리액션해 주는 사람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사회생활은 저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와인 한잔 곁들인 식사에 이런저런 대화를 하니 금세 두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잠시 휴식하는 분위기를 틈타 자연스레 빠져나왔다
오늘 회식자리 같이 온갖 에너지를 끌어모아 사회성을 발휘한 날은 모든 기가 빨린다
그러므로 다음날은 하루종일 집콕을 해줘야 회복이 된다
센터 여러 곳에서 근무하니 소속감은 줄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많아져서 좋다
집에서 샤워하고 살짝 덜 마른 머리를 한 채 팩을 붙이고 휴식타임을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집 가는 길이 설렌다
따뜻하고 조용한 집이 날 기다리고 있다
이게 바로 행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