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이 되다니
인간이 태어나 사람이 되려면 30년이 걸린다, 고 외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었던 때가 20살이었다. 이제 막 10대에서 벗어난 내게는 30이란 너무 먼 숫자였고, 그런 나이가 내게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영원히 10대일 것만 같았지만 20대가 되었다. 또 영원히 20대일 것만 같았는데.
27살에 직장을 관두고 방 안에 틀어박힌 지도 2년이 되었다. 2주에 한 번씩 정신과에 가 진료를 받고 약을 타 왔고, 그게 나를 잠들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보약처럼 취침약을 먹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내게 주어진 시간에 짓눌려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29살이 되고도 나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데, 모르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벌써 20대가 끝나간다니. 39살이 된다고 아는 게 많아질까? 지난날을 돌아보니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고, 술을 마시고 있었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월급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 식탁에 앉아 차가운 반찬에 소주를 마시다가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싶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엄마. 나는 29살인데. 아직도 사는 게 뭔지 모르겠어.”
“나도 모르는 걸 니가 어떻게 알어.”
막내딸이 29살이 되고 이제는 가사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나, 했더니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아와 다시 애를 키우고 있는 엄마. 몇 번의 취직과 퇴직을 거치고 가정 주부로 살다 겨우 자신만의 일을 시작한 엄마. 취하면 종일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두 번째 남편과 헤어지지 못한 엄마. 엄마의 29살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그때 엄마는 3살인 오빠를 키우며 나를 임신하고 있었다. 늘 힘이 들었고 그래서였는지 예정일보다 일찍 나를 낳았다고 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급했어.”
자는 게 예뻐 안고 있으면 답답하다 칭얼거렸다고. 볼을 꼬집으면 성질을 냈다고. 엄마의 이응보다 아니의 이응을 먼저 배웠다고.
“주먹만 했던 게 언제 다 커서 엄마랑 술을 다 마시고.”
“그래서 좋잖아.”
내가 능청을 떨면 엄마는 웃었다. 영 웃음이 없는 사람이 시원하게 소리를 내면서. 엄마와 함께 술을 마시면 소주를 3병은 거뜬하게 먹었다. 그러도고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고주망태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국물을 좋아해서 그럴 줄 알았다고. 엄마는 늘 알고 있었다. 내가 물컵을 엎어도, 걷다 넘어져도, 밥을 먹다 체해도, 무리하게 공부를 하다가 잠을 못 자도. 내 그럴 줄 알았다. 알고 있었으면 말 좀 해주지. 나는 이렇게 살 거라고. 그러면 나도 마음을 편히 먹었을 텐데. 술상을 치우고 양치를 하면서도 옛날이야기를 하느라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니 누그러져 있던 불안이 솟구쳤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가벼운 숙취에 시달렸다. 육개장 사발면을 먹으면서 가만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으로 봐서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 같았다. 내 앞날이 기대되지 않았다. 39살, 49살이 찾아와도 같을 것이다. 또 걱정만 하면서 소주나 마시고 있겠지.
계획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살아지는 대로 살게 되지 않을까. 어차피 이만큼 지나온 거, 또 똑같이 지나가지 않을까. 어른의 나이 30살. 내가 가지기엔 너무 큰 세월의 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나에게 번듯한 직장이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남들은 인생의 안정을 찾아간다는 시기에 나만 이렇게 떨어져 나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밥맛이 뚝 떨어져 젓가락을 놨다.
다이너마이트의 심지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터질 것 같았다. 11월이다. 이제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일자리를 구했다. 집 근처 공장의 교대 근무였다. 공고만 읽고 지원했는데, 내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계약서를 썼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달랐다. 한 달을 일 하고 관뒀다. 그걸 버티지 못했던 것은 내게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었는지, 그저 예민하고 게으르기 때문이었는지. 그런 정신머리로 뭘 하겠다는 건지. 공장에서 일하고 받은 돈을 아껴 친구들과 술을 몇 번 먹었고 통신비를 내니 12월 중순이었다.
가족들은 오전 8시면 집을 나섰다. 오후 4시가 될 때까지는 나 혼자의 시간이 보장되어 있었다. 내키면 화장실 청소를 했고 바닥을 좀 쓸고 닦았다. 더 내키면 가구 먼지들을 닦았고 마무리는 언제나 설거지였다. 고무장갑을 끼고 따뜻한 물에 그릇을 씻었다. 밥을 안 먹으면 설거지를 할 일도 없지 않나. 식기 건조대에 차곡차곡 그릇을 엎어두다가 잠시 멈췄다. 다 제자리가 있었다. 그릇, 숟가락, 젓가락, 주방용 티슈와 작은 참기름병.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싱크대 안에 고여있던 물이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며 사라지고 있었다. 고무장갑에 묻은 세제 거품이 투명한 자국을 남기고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가끔 소주를 마셨고 주로 위스키를 마셨다. 영화를 보면서 넋을 놓고 마시다 보면 700ml짜리 한 병은 우습게 비웠다. 다 마시고 모자라 맥주를 또 마셨고, 그렇게 취해서 누워있다가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약을 먹고 잠들었다. 그걸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나니 12월 31일이 되어 있었다.
12월 31일 밤 11시 30분. 29살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1월 1일이면 30살이 된다. 이불을 덮고 누워 시계만 봤다. 화면이 꺼지면 부은 얼굴이 보였고 다시 켜면 시간이 보였다. 1분이 모여 30분이 됐다. 1월 1일. 결국 30살이 됐다. 앞으로 누군가 내게 몇 살이에요? 하면 30살입니다. 라고 해야 했다. 그래도 되나? 근데 왜 아무 일이 없을까.
천지가 개벽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기분은 다를 줄 알았는데. 나는 30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아직 밤이라서 그런가. 본격적인 thirty-life를 살기 전이라서 그런가. 별일 없는데?
어제처럼 취침 약을 먹고 잠들었다.
꿈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꿨던가. 약에 취해 깊게 잠들었던 것도 같은데. 내가 꾸는 꿈을 늘 같았다. 뭔가를 피해 도망가고 있거나 쫓고 있거나. 맞거나, 때리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그렇게 자고 나면 개운하지도 않았다. 가족들이 출근 준비를 하는 소리에 깨 방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빗고 물을 마셨다. 하루의 무게가 다시 나를 짓눌렀다. 엄마는 58세가 되었다. 나는 30. 가족들은 어제처럼 집을 나섰고 나는 또 혼자였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멍하게. 이제 뭐 하지. 술이나 마실까.
대부분의 시간을 읽으면서 보냈다. 혹은 마시면서. 1월은 금방 지나갔고 2월은 더욱 짧았다. 3월이 왔고 달력을 보는 일이 더 이상 양심을 찌르지 않았다.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하루들이 우스워졌다. 멈춰있다고 생각했는데 날짜가 지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자랐고, 손톱이 자랐고, 살이 쪘다.
손톱을 자를 때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자꾸만 자라는 손톱이 내게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과 같게 느껴졌다. 손톱깎이를 들고 휴지통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눈물이 났다.
내가 무서워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살기로 마음먹었으면, 이렇게 살게 되는 건데. 직장이야 구해도 그만이고 안 구해도 그만이고. 친구들이야 만나도 그만이고 안 만나도 그만이고. 인생이야 살아도 그만이고 안 살아도 그만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포기하면 편하다고 했다. 받아들여야 하는 일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대로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물도 마시지 않았고 화장실에 가지도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시간은 갔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퇴근한 엄마가 돌아와 내가 없는 줄 알고 어휴, 하나밖에 없는 딸년은 저 지랄이고, 하다가 내 방문을 열었을 때. 누워 눈만 뜬 나를 봤을 때. 깜짝 놀란 엄마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신기하지 엄마. 이래도 살아진다? 이 지랄로도 살 수가 있다? 그게 너무 이상해.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날도 있었다. 물만 먹어도 그럭저럭 눈은 뜨고 있을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니 배도 고프지 않은 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밥맛이 없었다. 아. 밥맛 없다는 욕은 정말로, 상욕이었구나. 숨만 쉬어도 하루가 지나갔다.
허리가 아파서 자세를 바꿔가며 누워있었다. 이리저리 구르다 생각했다. 소시지를 이렇게 굽지 않나. 골고루 돌려가면서. 너무 오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뭔가를 하고 싶어 진다. 해가 지고 나서 이어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니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날부터 버릇처럼 나가서 걸었다. 무조건 한 시간 이상, 속도를 늦추지 않을 것. 나만의 규칙이었고 잘 지켜질 때도, 안 지켜질 때도 있었으나 만족스러웠다.
한동안 먹는 것보다 걷는 게 좋았다. 술을 마셔도 알딸딸한 정신으로 나가서 걸었다.
언제나 같은 길을 걸었다. 1414동 아파트에서부터 내리막을 지나 사거리, 예술회관 앞, 중앙 공원 옆, 복지관 산책로, 시장 주차장의 큰길을 따라 한 바퀴. 거기 있는 것들은 언제나 거기 있고, 없는 것들은 없다. 10년 전에 개업을 해서 가족과 함께 갔었던 가게가 여전히 영업 중이었다. 계산대 앞에 앉아 핸드폰을 보는 사장님도 여전하셨다. 어떤 마음으로 매일 문을 여셨던 걸까. 지칠 때는 없었을까. 도저히 한 걸음도 떼지 못할 만큼 아팠던 날, 너무나 행복해 햇빛 아래에만 있고 싶었던 날, 지루해서 모든 것을 대충 하고 싶었던 날. 그런 날에는 어떻게 하셨을까.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사는 걸까?
가야 할 길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다. 윗길로 걷고 싶으면 위로 올라갔다. 골목으로 가고 싶은 날은 골목으로 갔다. 음악을 듣고 싶지 않은 날은 듣지 않았고, 아주 느리게 걷고 싶은 날에는 느리게 걸었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반드시 안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했다. 다시 1414동 엘리베이터였다. 거울을 보며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나가기 전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마스크를 벗었다.
작년의 나와 같은 얼굴이었다. 다 그대로였다. 수도꼭지를 열었다. 찬물이 세차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 속으로 숨을 수는 없었다. 내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겼었구나. 낯설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얼굴이 이상해.”
“뭐가.”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아.”
“뭐가 아니야. 원래 그렇게 생겼는데.”
그렇구나. 원래 그랬구나. 엄마는 이번에도 알고 있었네.
걷다 보니 시간이 갔다. 너무 쉽게 하루가 사라졌다. 그렇게 조금씩 없애다 보면 분명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한 자유가 느껴졌다. 12월의 나와 3월의 나 사이에는 다른 점이 없었다. 이만큼 왔다는 것은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의미였다.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도, 사람도 싫으면 멈출 수 있지만 삶은 그럴 수가 없다. 번호를 삭제하고 SNS를 차단하는 편리함이나 퇴직원에 서명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일 같은 홀가분함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기 싫다고 막 관둘 수 없다. 어쨌든 살아가야 했다. 눈물이 난다면 울면서, 크게 다쳤다면 다친 채로, 걷지 못하겠다면 기어서라도.
30살은 언제나 점잖은 모양새로 내 인생을 두드리고 있었다. 차분하게, 조용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언젠가는 내가 찾아갈 거야.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 마. 그냥 나를 반겨줘. 그리고 좀 즐겨봐. 훨씬 편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