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첫 탈출, 타호 (1)

계속되는 생존 속에서도, 숨구멍이 필요했다.

by 유지니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작된 인플레이션은 데이비스의 기름값과 식탁 물가를 무섭게 밀어 올렸고, 치솟는 환율은 우리의 경제적 기반을 매일같이 흔들었다. 여유의 상징이었던 너겟 마켓 대신 코스트코와 트레이더 죠의 할인 상품을 찾아다니는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던 중에 남편의 첫 봄방학이 코 앞을 다가왔다. 일주일의 짧은 휴식. 우리는 이 팍팍한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내가 생각했던 럭셔리한 미국 생활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이렇게 데이비스에만 머물다가는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봄방학을 맞아 딱 3일만 어디로라도 여행을 떠나자 다짐했다.

미국 대학교의 봄방학은 일반적으로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 사이에 약 1주일간 주어진다. 대부분 학생들은 봄방학을 맞아 여행을 떠나는데, 조금 심한 경우 봄방학 전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 수업을 빠지고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거의 열흘이다). 친구들과 함께 플로리다의 파나마 시티, 마이애미 또는 멕시코의 칸쿤과 같은 따뜻한 휴양지로 이동하여 휴식과 파티를 즐긴다고 한다. 일부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또 일부는 봉사 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한다.


여러 후보지가 있었지만, 우리의 선택은 망설임 없이 레이크 타호(Lake Tahoe)였다. 이유는 명확했다. 첫째, 비행기를 타지 않고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거리라 비용 부담이 적었다. 둘째, 끝없이 펼쳐진 평지인 데이비스와는 정반대인, 눈 덮인 고산지대의 새로운 풍경을 통해 리프레쉬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3월에도 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딸 엘리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터였다. 3월의 끝자락은 타호에서 썰매를 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타호 호수는 미국인들이 휴가철에 가장 가고 싶은 장소 중에 하나로 유명하다. 수많은 매체와 여행자들이 입을 모아 최고의 장소라고 말하는 곳. 압도적인 자연과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활동들이 타호 호수를 특별하게 만든다. 겨울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스키장에서 새하얀 눈을 만끽하고, 여름이면 수정처럼 맑은 코발트블루 빛 호수에서 수영과 카약, 보트 등 온갖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그 여유와 역동적인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우리 가족의 힘든 미국 생활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를 타호로 이끌었다.




데이비스의 평지를 벗어나 북 타호로 향하는 길은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눈을 쓴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는 차가워졌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녹색에서 점차 은백색으로 변해갔다.

KakaoTalk_20250620_100610747.jpg 타호로 떠나는 즐거운 여행길


마침내 북 타호의 킹스비치(Kings Beach)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눈앞의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거울처럼 잔잔한 호수는 바닥의 조약돌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그 물빛은 세상의 모든 파란색을 다 섞어놓은 듯 깊고 영롱했다. 이것이 수천 년간 화강암 분지에서 걸러진, 타호의 순수한 물빛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호숫가를 걸었다. 차가운 모래를 밟고, 손을 담그면 뼛속까지 시릴 것 같은 물가에 서서 아득히 먼 맞은편 삐죽삐죽 침엽수림이 올라온 설산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계산과 걱정으로 가득했던 내 머릿속이, 저 거대하고 단순한 자연 앞에서 잠시 텅 비는 기분이었다.

SE-414b8b70-a516-43b3-b03c-af7fb7479e76.jpg?type=w1 북타호 Kings Beach에서


그날 저녁, 근처 피자집에서 피자를 포장해 예약해 둔 호텔로 돌아왔다. 따뜻한 피자를 나눠 먹으며 창밖의 어둠과 고요를 바라보았다. 비록 호텔방에서의 소박한 식사였지만, 그 어떤 레스토랑에서의 만찬보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타호에서의 첫날밤이 깊어갔다. 내일은 소다 스프링스(Soda Springs)다. 엘리가 그토록 원하던 썰매 타기를 할 장소. 내일 하루 원 없이 놀아주기 위해 우리 가족 모두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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