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10일. 출국까지 딱 이틀 남은 날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우리 세 가족은 왕복 5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 전세계약을 하러 가고 있었다. 만 2살 엘리는 뒷좌석에서 칭얼대고, 남편은 고속도로를 달리며 피곤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늦어졌지만 지금이라도 해결하니 다행이지. 제발 무사히 계약만 잘 끝내자.' 10월부터 여러 번 매도 기회가 있었는데 놓쳐버리고, 그래도 뒤늦게나마 전세계약이 잡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출국 직전까지 집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2년간 텅 빈 집의 관리비를 고스란히 물어야 했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이미 가계약을 해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황이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집값이 하늘로 치솟던, 그야말로 광풍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이 광풍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만약 집을 팔고 미국에 갔다가, 2년 후에 돌아오면 다시는 같은 수준의 집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첫 집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소중했던 것도 있다. 처음으로 분양에 성공하고, 우리 딸 엘리도 생기고, 남편은 해외로 유학 기회까지 잡게 되었으니까. 정을 떼야 집을 팔 수 있다던데, 우리는 아직 첫 집과의 정을 떼기에는 너무 어렸고, 일렀던 것 같다.
남편이 LLM에도 떨어져서 해외에 나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남편은 MBA를 준비하다가 떨어지고, 뒤늦게 부랴부랴 LLM을 지원했는데, 나는 마지막까지 이 양반이 LLM마저 합격하지 못하면 미국에 못 가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곤 했었다. 그럴 경우 집을 팔아버리면 우리 몸 누일 곳 하나 없어 급하게 전월세를 알아봐야 할 터였다. 그 과정에서 집값이 더 오르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매매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나마 타협점으로 찾은 것이 전세였다. 2년 정도 전세를 놓고, 그 돈으로 미국 생활비에 보태자는 계산도 있었다.
전세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여러 부동산에서 "제발 저희에게 물건을 주세요"라며 애원하다시피 했다. 그중 가장 빠르게 연락이 온 H부동산을 선택했다. 사장은 우리 마음이 바뀔까 봐 가계약서를 문자로 보내왔고, 계속해서 계좌번호를 재촉했다. 500만 원의 가계약금을 받고, 세입자 요청대로 식기세척기 자리에 새 수납장까지 짜 넣었다.
드디어 계약 당일. H부동산 사무실에는 우리 쪽 H부동산 사장과 세입자 쪽 중개사, 그리고 세입자 부부가 자리했다. 가장 멀리서 온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했고, 계약당사자인 세입자 부부는 약속시간에서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부인 쪽이 불만이 많아 보였고, 남편 쪽은 화를 삭이는 모양새였다.
계약서를 검토하던 중, 나는 당연한 듯이 물었다.
"혹시 나중에 집을 팔 생각이 있어서요. 매매하게 되면 집 구경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저희 집 보여줄 생각 없는데요." 세입자 부인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냥 계약하지 마시죠."
"네?"
나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아니, 매번 보여달라는 게 아니고요. 진짜 살 사람만, 1년에 2~3번 정도만이라도..."
"아니요. 그냥 계약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불과 출국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파기라니? 마침 엘리가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말썽을 부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 있었다. 부동산 계약이 처음인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머리가 새하얘지던 찰나, 세입자 남편이 미리 준비된 대사처럼 재빨리 덧붙였다.
"자, 그러면 가계약금은 다시 돌려주시죠."
나는 H부동산 사장을 쳐다봤다. 분명 '전세 기간 중 매매 가능성'에 대해 세입자에게 확인해 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었다. 문자로도 증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걸 빌미로 계약을 파투 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방 중개인은 가만히 있는데 H부동산 사장이 더 적극적으로 상대방에 찬동한다.
"아유 계약이 안 됐는데 당연히 가계약금은 돌려줘야지~ 젊은 사람들이 잘 모를 수 있는데 원래 그런 거야."
H부동산을 믿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시련이 오나 싶었다. '내일모레면 출국인데, 이제 어쩌지.' 갑작스러운 계약 파투에 정신이 혼미한 사이,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계좌번호를 받아 적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남편이 뭔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H부동산에 분명 '전세 기간 중 매매 가능성'에 대해 세입자에게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잖아. H부동산이 확인했다고 해서 계약서를 쓰러 간 거고. 그런데 왜 우리가 가계약금을 돌려줘야 해?"
"H부동산 사장님이 원래 계약이 안 되면 가계약금은 돌려주는 거라고 했어."
"가계약 문자를 잘 보면 배액배상 조항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가계약을 파기한 당사자가 가계약금에 책임이 있는 것 같거든."
가만히 생각하니 2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다. H부동산이 세입자 부부에게 우리 요구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안 했던지, 아니면 세입자 부부가 우리 요구조건을 알면서도 계약을 파투내기 위해 이용했던지. 어느 경우라도 우리의 책임은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는 세입자 부부의 요구에 맞춰 식기세척기 공간에 수납장을 짜 넣기도 했지 않은가. 나는 가계약금 반환을 거부했다. 그러자 H부동산의 본색이 드러났다.
"계약금 반환 없이 다른 계약을 하면 이중계약입니다."
"법적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미국 가시는데 괜히 소송에 휘말리면 골치 아파지실 거예요."
협박성 문자가 쏟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오히려 우리가 먼저 중개사의 선관의무 위반으로 고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출국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법적 분쟁에 휘말릴 여유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 협박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빈 집은 그대로 남겨둔 채로.
'설마 진짜로 소송까지 가겠어?' 남편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가계약금 500만 원 때문에, 그것도 상대방이 먼저 계약을 포기한 상황에서 무슨 소송을 한단 말인가. 실제로 소송이 걸리더라도 과거 판례도 있던 터라 우리가 유리했다. 태평양 상공을 날면서도 한국에 두고 온 빈 집이 마음에 걸렸지만, 적어도 법적 분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우리는 "전세 파투 사건"에 대해 잊어갔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