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시여

by 고석근

하늘이시여!


양심은 수천, 수만 명의 증인과 같은 것이다. - 리차드 타버너



길에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자가 왜 그 환자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단다.


그러자 사람들이 대답하더란다. “CCTV가 있으면 도와주지요.” 남을 도와주다가 피해를 입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ㅈ 나라에서는 버스 안에서 쓰러져 있는 노인을 도와주었다가 고소를 당해 그 노인에게 금전적 보상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노인은 고소장에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왜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남을 도와주겠느냐? 그가 나를 쓰려 뜨려 죄의식을 느꼈기에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했단다.


법원에서는 노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도와준 사람에게 보상을 하라고 선고했단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의 양심은 분노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될 것이다.


양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나는 마음이다. 인간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낀다. 그 공감의 힘으로 우리는 눈부신 문명사회를 이루었다.


그런데 현대자본주의는 공감이 아닌 개인의 이기적인 마음을 세상의 중심에 놓는 사회다.


자본주의 이전까지는 양심이 세상을 받치는 고귀한 정신으로 존중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인간 개개인의 이기심이 모여 전체 사회의 이익이 된다는 해괴한 이론이 등장했다.


이것이 고전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는 인간 내면에 ‘도덕 감정’이 있어 이 마음이 개인의 이기심을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후의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개인의 이기심이 전체 사회의 이익으로 수렴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세상은 약육강식의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자본가들은 인간의 이기주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 탐욕으로 엄청난 소비가 늘어나야 그들의 자본이 계속 증식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양심이 자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CCTV’가 필요하다.


인간 사회 전체를 보는 눈, 그 눈이 있어야 사람들은 마음 놓고 자신의 양심대로 살아갈 수 있다.


원시부족사회에서는 부족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었다. 서로의 삶을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모두의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커다란 눈, 그 눈을 원시인들은 신(神), 하늘(天)이라고 했다.


지금도 우리는 무심코 내뱉는다. ‘하늘이시여’ 어떻게 이 하늘을 복원할 것인가? 우리 모두를 보는 눈을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


CCTV를 모든 곳에 설치하면 될까? 그러다 CCTV를 개인, 혹은 소수가 지배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CCTV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큰 사회를 나눠 옛날 원시부족사회처럼 작은 단위의 사회로 가야하는 걸까?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너의 하늘을 보아》부분



우리는 너무나 힘들 때 하늘을 본다. 시인은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하늘이 있으니 ‘너의 하늘’ 보라고 한다.


우리 모두가 항상 각자의 하늘을 보고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큰 하늘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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