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자신의 상식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이웃을 억압하는 것이다. - 미셸 푸코
한강에 빠진 한 젊은이가 자신을 구조해달라고 119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119요원은 장난인 줄 알고 비아냥댔다.
“강물 속에서 헤엄을 치면서도 전화를 아주 잘 하시네요.” 헉헉대는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은 어땠을까?
만일 어떤 아이가 그런 전화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대번에 알아챘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이다!”
119 요원은 우리 사회의 ‘상식’을 갖고 있었기에, 상식 밖의 일은 상식적인 상상력 밖의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아직 상식이 부족한 아이는 느낌으로 확연히 알았을 텐데. 상식적인 그녀의 귀에는 그의 비명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푸코는 말했다. “자신의 상식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이웃을 억압하는 것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야!” 아이에겐 진실을 꿰뚫어보는 직관, 통찰이 있다. 이런 비상한 능력을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잃어버린다.
‘상식으로 사는 세상’은 언뜻 보기에는 잘 돌아간다. 미리 예측할 수 있기에 마음이 편하다.
미리 정해진 매뉴얼대로만 살아가면 되니까 골치 아픈 생각 같은 건 안 해도 된다.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얼마나 편안한가!
하지만 문제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다. 수없이 일어나는 사건 사고에는 상식은 무용지물이다.
이 세상이 상식대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사정없이 허물어질 때, 우리는 부조리를 경험한다.
아, 이 세상은 도무지 조리가 없구나! 막막해진다. 이 세상에 툭 내 던져진 존재.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은 이런 ‘실존적 존재’라고 말한다.
실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가야 하는 존재. 카뮈는 이 세상의 상식에 반항하라고 말한다.
그의 불후의 명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이 세상의 상식에 반항하는 항상 깨어있는 존재다.
남이 볼 때는 어처구니없는 인간이다. 심지어 사회성을 잃어버린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 같다.
그렇지 않다. 그는 지극히 사회적인 존재다. 그는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상식을 거부하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아이’가 있다. 상식을 전혀 모르는 아이가. 우리는 이 ‘아이’를 소중히 보존해야 한다.
뫼로소는 내면의 아이를 지키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 세상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른들만 살아가게 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뫼르소는 자신을 재판하는 로봇 같은 관료들을 보며 생각한다. ‘저들은 자신 안의 아이가 깨어날까 두려워 나를 죽이려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로봇 같은 관료들이 지배하는 세상의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다.
히틀러가 그들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게 될 때 인간 세상은 한순간에 홀로코스트(유태인 대학살)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한 젊은이를 한강에 빠져죽게 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안의 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희생을 되새겨야 한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란 생각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황지우, <길> 부분
우리는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도 시인처럼 언젠가 그 길은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