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이제야 어떤 신이 내 몸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나이가 들면 아이로 돌아간다더니, 아침에 일어나면 걸음걸이가 다르다. 흡사 세살배기가 걷는 것 같다.
넘어질 듯 뒤뚱거린다. 웃음이 나온다. 서서히 되돌아가는구나! 그러다 지상에 오기 전으로 돌아가겠지.
그렇게 깔끔하게 아이로 돌아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조상님들은 산에 무덤을 썼다. 자궁이다. 좌와 우에 청룡과 백호의 둔덕이 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죽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천지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나도 ‘어르신의 반열’에 들었으니 적극적으로 아이로 돌아가는 연습을 해야겠다.
니체는 아이로 되돌아가려면 사자를 거쳐야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낙타로 살고 있다.
세상이 얹어주는 짐을 등에 지고 자랑스럽게 걷는다. 나는 ‘ㅅ 맨’이야! 연봉이 억대라고!’
우리는 낙타가 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정진하는가? 오로지 낙타다운 낙타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바늘구멍 같은 취업의 한길을 걷는다.
그런데 니체는 낙타에서 탈주하라고 말한다. 등에 진 짐을 다 벗어던지고 사막에서 뛰쳐나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자가 될 거라고. 사자는 자유다. 그는 두려울 게 없다.
온 세상에 그의 밥이 널려있고 어디가나 그의 집이다. 그는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사자는 니체가 말하는 ‘정오의 시간’을 겪게 된다. 그림자 하나 없이 환하게 보이는 세상.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이다. 사자는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마음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기에 그렇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한다. 그가 소리치면 산천초목과 모든 짐승이 조용히 듣는다.
하지만 사자에게는 신명이 없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가 아니다. 사자는 다시 아이로 거듭나야 한다.
아이는 마냥 즐겁다. 시간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아무리 힘겨운 것들도 한숨자고 나면 다 잊어버린다.
그의 가슴에서는 생명수가 항상 솟아난다. 그는 바로 천자자연 그 자체다. 영원한 우주의 춤이다.
아이로 돌아가면, 우리는 죽음을 잠자듯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되려면 반드시 사자를 거쳐야 한다.
많은 노인들이 사자를 거치지 않고 아이가 되어버린다. 드라마를 보며 훌쩍거린다. 아기처럼 투정을 부린다.
이런 아이는 여전히 어른이다. 어른이 아이 흉내를 내며 살아가니 보기에 얼마나 민망한가?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박재삼, <천년의 바람> 부분
우리는 아이가 되지 못해 항상 이상한 것에 눈을 돌린다. ‘어디 뭐 신나는 게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