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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묵자흑(近墨者黑)

by 고석근

근묵자흑(近墨者黑)


고민하면서 길을 찾는 사람들, 그들이 참된 인간상이다. - 블레즈 파스칼



오래 전에 ㅂ 시장 후보의 선거를 도와준 적이 있다. 그 후보가 당선되면서 내게 시장 비서실장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그 시가 농업이 주업이라, 전체 시의 농업인이 유기농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그 시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다. 어느 날, 한 예술가와 술잔을 나눴는데, 그가 말했다.


“내가 사는 마을 입구에는 조선 시대 모 선비의 묘가 있어요. 묘비가 아주 훌륭한 예술 작품인데요. 그 묘비를 관리하지 않아 자꾸만 망가져가고 있어요.”


그는 자신이 그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그 묘비의 문화적 가치를 해설해주고 그 묘비를 관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서 깊은 지역이라 곳곳에 유적이 많았다. 유적들과 그 지역에 사는 예술가들을 연계하면, 아주 작은 예산으로도 유적들을 잘 보존하고 많은 사람이 유적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일들을 하려면 내가 시장 비서실장의 소임을 맡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여러 통로를 통해 내게 크고 작은 로비들이 들어왔다.


나는 그 소임을 맡다가는 나도 모르게 커다란 거미줄의 덫에 걸릴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결국 그 제의를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어릴 적에 삼국지를 읽으며 제갈공명이 가장 멋지게 보였다. 그의 신선 같은 풍모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가 내게 이상적인 인물로 보였던 것은, 그의 모습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가면서 그런 나의 모습을 몇 번 보았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마을 아이들과 모여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두 편으로 갈려 서로의 진지, 둥글게 그린 원을 발로 밟고 뛰어나와 상대의 몸을 터치하는 것이었다.


늦게 나온 아이가 강자였다. 그렇게 경기를 하다 상대방의 진지를 발로 밟으면, 점령하면 승리했다.


우리 편이 자주 승리했다. 그러자 상대방 편의 한 또래 아이가 내게 항의했다. “너희 편에는 큰 아이들이 많아서 그래!”


그때 내 안에서 한 아이디어가 번갯불처럼 일어났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 우리 편에 작은 아이들을 많이 줘!”


그래서 놀이판은 적은 수의 큰 아이들이 모인 상대편과 많은 수의 작은 아이들로 구성된 우리 편으로 재편되었다.


상대편의 큰 아이들은 헤죽헤죽 웃었다. 우리 편의 작은 아이들을 같잖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놀이가 시작되자마자 일정 수의 작은 아이들을 동시에 진격하게 했다. “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작은 아이들에게 상대편의 큰 아이들은 당황했다.


그 혼란한 틈을 타 나는 나머지 작은 아이들을 달려 나가게 했다. 우리 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나는 살아오면서 이런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큰 성과를 낸 경우가 여러 번 있다. 그때 내가 시장 비서실장을 맡았으면, 나의 작은 아이디어들로 그 시에 크게 유익한 사업들을 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근묵자흑, 먹을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 나는 내 자신이 검어지는 게 두려웠다.


오래 전에 술자리에서 ㅈ 국회의원의 출사의 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걸레가 되어야 해!”


나는 그가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런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몸을 더럽히게 되었을까?


그는 몇 년 후 돌아가셨다. 그가 지금 살아있으면 어떤 모습일까? 그때처럼 기품 있는 풍모일까?


이제 언론 매체에서만 정치인들의 동정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저 분들 중에도 아름다운 걸레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까?’



동해 바다 작은 섬 갯바위의 흰 백사장

나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네.


- 이시카와 다쿠보쿠, <게> 부분



시인은 (혼탁한 세상이 견딜 수 없어) 자살하려 동해 바다로 갔다가 되돌아왔다고 한다.


‘나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네.’


시인은 게와 놀며 인간과 어울려 노는 환상에 젖었을 것이다. ‘인간들도 이렇게 함께 어울려 즐겁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는 항상 울고 있는 영혼이 있을 것이다. ‘아, 어떻게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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