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

by 고석근

우물 안 개구리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설명할 수 없다. 우물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만 살다 죽는 곤충에게는 얼음을 알려 줄 수 없다. 시간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 장자, <장자 제17편 추수>에서



나는 경북 상주시 내서면의 한 산골에 있는 작은 우물에서 태어났다. 그 우물은 ‘골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첩첩산중의 한 작은 산골 마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큰 도로가 나 있다.


그 도로가 예전에는 산길이었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꿈에 개구리가 되어 그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작은 하늘 아래에서 나는 마음껏 풍덩거리며 놀았다.


그러다 세 살 때 상주읍이라는 큰 우물로 이사를 갔다. 우물 안에는 낡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의 큰 마루 밑에 들어가 복작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철이 들면서 우리는 ‘주막듬’이라는 작은 우물로 이사를 갔다.


나는 아직 철이 없을 때라 새로운 우물 속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함께 신나게 놀았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하듯 아이는 최고의 인간이다. 그는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을 깡그리 잊는 아이는 항상 즐겁다. ‘지금 여기’를 한껏 즐긴다. 아이에게 우물 안은 얼마나 신나는 곳인가!


나는 그때 신화시대의 인간이었다. 수만 년 동안 원시인들은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하나의 우물 속에서 살아가는 원시인들은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의 세계는 완벽한 자궁이었다.


그러다 철기가 등장하면서 부족 간에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는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다.


우물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었다. 그때 성자(聖者)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나의 철기 시대는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주막듬이라는 우물에서 마냥 즐거웠던 아이는 읍내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웃음을 잃어갔다.


읍내의 개구리들은 희멀건 했다. 시골 개구리들과 확연히 달랐다. 나는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이후의 나의 삶은 계속 한 우물에서 벗어나 새로운 우물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동물은 한평생 한 우물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언제 봐도 평온하다.


인간은 동물에서 ‘생각하는 존재’로 진화하면서, 한평생 새로운 우물을 계속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니체는 그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고통은 기쁨으로 화한다고.


그렇다. 우리는 고통을 사랑스럽게 안고 살아가야 한다. 고통을 주는 모든 다른 존재들을 사랑해야 한다.


장자는 우리에게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지 말라’고 다그친다. 쉼 없이 바위를 위로 굴려가야 하는 시지포스가 우리의 운명이다.


그리스 신화에 코린토스의 왕 시지포스가 등장한다. 그는 신들을 속인 죄로 지옥에 떨어져 거대한 바위를 산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그 바위를 지고 멀고도 높은 산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돌이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시지포스는 이 고통을 반복하게 된다.


프랑스 실존주의자 알베르트 까뮈는 ‘시지포스의 신화’에서 인간의 숙명적 굴레를 본다.


우리의 삶은 어떤가? 매일 똑같은 날들이 반복된다. 우리는 이 벗어날 수 없는 부조리 앞에서 절망한다.


까뮈는 말한다. “이 부조리한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여라!” 니체의 아모르파티(운명애)다.


머리로 생각하는 시지포스는 비극이지만,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시지포스는 충만한 희열이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여보자! 머리를 텅 비우고 오감을 열어 감각적으로 이 순간을 다 느껴보자.


아무리 힘든 순간이어도 이 순간은 기쁨으로 화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알아차림의 명상이다.


까뮈는 형벌을 받는 시지포스를 부조리한 시대를 멋지게 살아가는 영웅으로 재탄생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우물 안에서 살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부족사회가 아니다.


각자의 우물을 벗어나 계속 새로운 우물을 건설해야 한다. 끝내 하나의 큰 우물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이 형벌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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